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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생각’] 오래 지켜야 할 당산제와 당산나무
2020년 01월 23일(목) 00:00
설 즈음, 적막하리만큼 고요했던 겨울 농촌이 한층 부산해진다. 마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설날이나 정월대보름 앞뒤에는 당산제 혹은 대동굿을 올릴 채비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차츰 사라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당산제는 농촌 마을에서 아주 중요하게 치르는 연례행사다. 당산제는 대개 마을에 있는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 앞에서 지낸다.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는 그래서 당산나무라고 부른다. 당산나무와 당산제는 농경문화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다.

농부들은 예로부터 ‘하늘이 주는 만큼만 먹고 산다’고 했다. 농사에 필수 요소인 햇살이나 비를 내리는 건 모두 하늘이다. 농부들은 먹을 걸 내려주는 하늘을 향해 풍년을 기원하며 빌었다. 그러나 사람의 소원이 닿아야 할 하늘이 너무 높았다. 소리쳐 빌어도 한낱 농부의 목소리가 저 높은 하늘에 닿을지 의구심이 앞섰다. 시름겨운 마음으로 하늘만 바라보던 순간, 애타는 농부의 눈길에 하늘에까지 닿은 거대한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의뭉스러운 한 그루의 큰 나무였다. 사람들은 꾀를 냈다. 하늘에 직접 소원을 빌기보다는 하늘에 닿아 있는 나무에게 소원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낫지 싶었다. 사람의 마음이 허공에 흐트러지지 않게 잘 모아 하늘에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뿐 아니라, 하늘에 대한 경외심까지 표현하는 일거양득의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무를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로 삼았던 것이다. 덕이 높은 어른을 제주로 정하고, 추대된 제주는 몸을 정갈히 했으며 사람들은 정성껏 제수를 차렸다. 그리고 설 즈음의 어느 날, 나무 앞에 모두 한 마음으로 모였다.

나무를 사람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물로 여기고 나무를 숭배하기로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서양 게르만 민족 역시 농경을 주로 하던 시절에 나무를 신(神)적인 존재로 숭배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인류학의 고전인 그의 걸작 ‘황금가지’에 아예 ‘나무 숭배’라는 중량감 있는 챕터를 따로 마련하고, 다양한 나무 숭배 사례를 기록했다.

그중 고대 게르만족의 사례는 놀랍다. 게르만족은 나무껍질을 벗겨 나무의 생존에 위해를 가한 자를 엽기적으로 처벌했다. ‘나무껍질을 벗긴 범인의 배꼽을 도려내고는 그 배꼽 자리와 껍질이 벗겨진 나무 부위가 서로 맞닿도록 못질을 한 다음, 범인의 창자가 모두 나무에 감겨질 때까지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리는’ 방식을 법으로 정해 두었다. 사람의 살가죽을 나무의 껍질과 동일시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형벌이다. 나무를 거의 신과 같은 영험한 존재로 여겼다는 증거다. 나무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며 당산나무 앞에서 제를 지내던 우리 민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신화도 전설도 사라져 가는 과학의 시대다. 우리 과거의 문화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당산제도 하릴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당산제를 지내는 곳에서조차도 예전처럼 나무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건 아니다. 다만 한 해에 한 번씩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한 해 농사를 잘 지어 보자고 다짐하는 마을 잔치의 성격으로 당산제는 이어지고 있다.

당산나무 앞에서 치르는 당산제가 사라지는 이유도 여러 가지다. 한때는 당산제를 ‘미신’으로 치부해서 ‘미신 타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워 몰아내기도 했고, 유일신을 섬기는 외래 종교의 부흥에 의해 밀려나기도 했다. 또 최근 공동화 현상을 보이는 농촌에서는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필요한 길굿을 치를 농악대의 인원이 구성되지 않아 당산제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 마을 살림살이의 내일을 내다보며 마을 사람이 한뜻으로 모여 나무 앞에서 사람살이의 평안을 빌었던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전통이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이미 사라진 당산제를 복원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아직 남아 있는 당산제만큼은 이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농경문화의 귀중한 문화 자산인 당산제와 당산나무가 더 오래 우리와 함께 살아 있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설날이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