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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장흥 고씨 학봉 고인후 종가의 씨간장
2020년 01월 16일(목) 00:00
“우리 집은 구한말 때 망한 집이여. 그때부터는 일본 놈들 무서워서 한군데서 못 살았어. 신위만 모시고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친척 집에 더부살이를 해야 했어. 남들 같으면 벌써 고향을 떴을 것인데 종가라 그러지도 못했어. 일본 놈들이 다 불 질렀는데 장독 하나 살았어. 그 장독에 있던 씨간장이 말로는 400년 된 거래. 그거 하나 남았어.”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학봉 고인후 종가의 종손 고영준 씨의 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장흥 고씨 집안의 고경명은 6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장남 고종후 차남 고인후 등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고경명의 격문에 호남의 의병 6천여 명이 모인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가 전사한다. 이때 살아남은 장남 고종후도 이듬해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전해 전사한다. 이들의 업적을 기려 조선 왕실은 불천위(不遷位)를 내린다. 불천위는 4대로 끝나야 하는 제사를 영원히 올릴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영예였다. 장흥 고씨 가문은 조선 500년 역사상 삼부자가 왕으로부터 불천위를 받은 유일한 집안이다.

그로부터 300년 후.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자 고인후의 11대 종손 고광순은 1895년부터 총을 들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을 ‘집안과 나라의 원수’라 부르며 10년 넘도록 항거하다 1907년 구례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했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의병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고광순의 생가를 불태웠다.

일제가 생가를 불태울 당시 외아들 고재환이 이를 막으려다 총검에 찔렸고 후유증으로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때 대대로 내려오던 종가의 유품들이 모두 불타 버렸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간신히 신위(神位)만 챙겨 나왔다. 가족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신위를 모시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떠돌아야 했고, 제각(祭閣)에서 해방을 맞았다. 자칫 종손의 대가 끊길 뻔했으나 고영준 씨가 20대 젊은 나이에 양자로 들어오면서 종가의 맥을 잇게 됐다.

집안의 기록은 고사하고 숟가락 젓가락 하나 남은 게 없었던 종가. 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들이 이루는 삶 속에서 잉태되고 존재한다. 일본 경찰은 그 삶의 흔적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때문에 학봉 고인후 종가가 가진 가장 찬란한 유산은 ‘나라를 지키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실’ 자체다. 음식은 그 숭고한 역사의 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일제의 잔혹한 만행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세 가지가 있었다. 살아남은 가족과 그 가족이 끝내 지켜 낸 조상의 신위. 그리고 씨간장이 담긴 장독 하나. 신위는 학봉 종가의 충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남은 가족은 종가의 전통을 복원하고 계승시킬 주체였다. 사라졌으되 사라지지 않은 것. 오늘도 종택과 신위를 지키며 불천위 제사를 이어 가고 있는 고영준 종손과 이재숙 종부의 존재는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학봉 종가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장독이 있었다. ‘말로는 400년이 된 거’라고 고 씨가 겸손하게 말했던, 씨간장이 담긴 바로 그 장독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간장의 가치를 알아보는 입맛 매섭고 눈 밝은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300년이 되었건 400년이 되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입맛 매섭고 눈 밝은 이들은 그 간장 속에서 수백 년을 버텨 온 미생물의 존재와 그 미생물이 만들어 내는 모방할 수 없는 맛의 가치를 알았다. 너도나도 그 간장을 탐냈다. 종부는 말렸지만 배포 크고 인심 좋은 종손은 거침없이 간장을 나눠 주었다.

씨간장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새로운 간장을 탄생시키는 근원이 되며 무한히 복제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사라졌으되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 전통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요리연구가가 씨간장을 얻어 갔다. 그들이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간장이다. 그 가운데 한 음식점은 최근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인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을 받았다.

덕분에 이 음식점에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과 중국인이 많이 찾는다. 같은 장(醬) 문화권에 사는 이들 나라의 관광객들은 장맛의 근원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지만, 맛의 깊이는 짐작할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가끔 그 식당에서 ‘오이시이(맛있다)!’를 연발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난다. 그들을 보며 ‘그 장맛의 일부는 당신네 조상들이 흔적조차 없애 버리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집안의 전통’이라고 속으로만 말한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다행히 버텨 준 장독이 그렇게 대견하고 감사할 수 없다. 장흥 고씨 가문의 우국충절이 잊히지 않듯, 그 간장 맛 또한 한국 음식 곳곳에 스며들기를 기원한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