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서효인의 ‘소설처럼’] 일과 당신 -김혜진 ‘9번의 일’
2020년 01월 01일(수) 21:40
‘딸에 대하여’를 읽은 독자라면 김혜진 작가에 대한 애틋한 신뢰를 이미 갖고 있을 것이다.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취재. 등장인물 누구도 허투루 배제하지 않는 섬세한 구성. 거기에 약자와 소수자의 손을 맞잡는 윤리적 태도까지…. 최근 한국소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을 김혜진 작가는 두루 갖추었다.

주변부로 밀려난 여러 세대의 여성과 가족에게 환영받기가 더 힘든 여성 퀴어 이야기를 다루었던 ‘딸에 대하여’에서 소설의 동력은 인물들의 ‘일’이다. 딸은 비정규직 시간강사를 전전하며 이제는 강사 처우 개선을 위해 싸운다. 어머니는 역시 비정규직으로 요양병원 간병인으로 일하며 죽음을 앞둔 ‘젠’을 만나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이룬다. 젠은 한때 사회적 존경을 받던 활동가였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거나 예전에 했었던 일(직업)은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직업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직업이 전부인 사람도 많다. 누구나 인간 아무개라고 부르기보다 작가 아무개, 공무원 아무개, 의사 아무개, 환경미화원 아무개라 부르는 편에서, 그 아무개의 정체를 발견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속물이어서가 아니다. 이름 앞에 붙는 그의 직업이 실제 그의 정체성이 될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딸에 대하여’에서의 딸 또한 딸이자 여성이자 퀴어인 만큼, ‘인문 계통 전공자인 대학 시간강사’라는 그의 형편이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작가 김혜진은 최근 소설 ‘9번의 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때로는 존재마저 지배하는 ‘일’의 본질을 소설의 정중앙에 배치한다.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거세게 끌어내 앉힌 것이다.

첫 문장은 이렇다.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 팀에서 26년을 일했다.” 이 짧은 문장이 그에 대해 알려주는 바는 생각보다 많다. 이 소설 안에서는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그는 회사의 성장을 함께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잘라내야 할 정리 대상일 뿐이다.

인사 관리자는 깍듯한 듯하지만 냉정하게 퇴사 조건을 설명한다. 관리자의 말대로 그 조건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그만두어야 앞으로 닥칠 고난과 수치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점점 한직으로 내몰릴 것이다. 급여가 깎일 것이다.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일할 것이다. 그동안 안 해 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위험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일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정체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잊을 것이다. 회사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실제로 그는 그렇게 된다. 그 나이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엇비슷한 방식으로 닥칠 법한 경제적인 사유가 그를 그만두지 못하게 한다. 실패한 부동산 투자, 대학 진학을 앞둔 아들, 경제적 도움을 바라는 고향의 노모와 형…. 하지만 그가 일을 그만두지 못함은 그걸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일이 곧 자신이었다. 일을 관두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끝내 사직서를 내지 않음은 그에게는 곧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일로 보인다.

현장에서 통신기기를 잘 수리하던 그는 난생처음 해 보는 영업 일에도 본인의 장점을 살려 그 일을 해 보려 한다. 그러나 회사에서 지금 그에게 바라는 것은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 회사를 나가서 인건비 부담을 줄여 주는 것뿐이다. 그에게 회사는 단순한 숫자의 조합이 아니었으나 그는 회사에서 단지 숫자의 조합에 불과했다. 회사는 누군가에게는 인센티브를 주고, 누군가에게는 수십억의 가압류를 통보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9번이 된다.

그는 소설 말미에 이르러 ‘아무개 씨’에서 ‘9번’으로 정체를 바꾼다. 그는 끝내 이런 원성어린 질문도 받는다. “도대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회사 수족이요? 개요? 당신은 생각할 줄 몰라?” 78구역에 철탑을 설치하며 그는 실제로 아무런 생각이 없다. 심지어 사람으로 아니 보이기까지 한다. 길을 잃고 다닌 (진짜) 개를 돌보고 주인을 찾아 돌려줄 때 그는 잠시 사람인 듯하지만, 일의 안쪽에 들어와 그는 다시 9번이다.

‘아무개’에서 ‘9번’이 될 때까지 그는 어쩌자고 거기까지 간 것일까. 그는 떠밀렸을 테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그 떠밀림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래도 다시 아침이면 출근길의 버스와 전철에 오른다. ‘*** 아무개’가 되어, 혹은 ‘9번’이 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