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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5월 20일 ‘가두방송’
전춘심과 차명숙에게는
꼭 필요한 대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이 방송 멘트를
메모지에 적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전춘심과 차명숙은
돌아가면서 방송을 하다가
목이 쉬면 대학생에게 맡기곤 했다
2019년 12월 19일(목) 04:50
<삽화:이정기>
꼭두새벽에 차가운 봄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박효선은 골방에서 옅은 잠을 자며 뒤척거렸다. 동리소극장과 녹두서점, 광천동 윤상원 자취방을 오가며 흥분한 탓에 머릿속이 개운치 않았다. 금남로 시위의 잔상이 어른거려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박효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윤상원 선배가 주도하는 투사회보 제작에도 건성으로 간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따로 대자보 팀을 만들어 기존의 신문이나 방송을 대신해서 시위상황을 알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네 같은 절지동물이 사그락 사그락 골방 벽을 타는 소리가 들렸다. 박효선은 소름이 끼쳐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고 골방 벽을 살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방 밖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빗방울은 처마 기왓장 끝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빗소리는 박효선의 귓전으로 한 땀 한 땀 파고들었다. 쓸쓸하고 조금은 느긋하게 들리는 빗소리였다. 봄비소리 때문에 잠은 저만큼 달아나버렸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바로 그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정 무렵에 용달차를 탄 두 여자가 교대로 방송하고 있었는데, 그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한 여자는 30대 초반, 또 한 여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대학생 서너 명은 용달차 짐칸에 서서 방송하는 두 여자를 돕고 있었다. 성능이 좋은 확성기로 교체했는지 멀리서 나는 소리였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축축한 밤공기 탓인 듯 가깝게 들렸다. 귀전으로 다가오는 빗소리와 달랐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들렸다. 박효선은 벌떡 일어나 앉아 ‘워미!’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당신들은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라는 군인입니다. 광주시민은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광주시민에게 총구를 겨누어서는 안 됩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공수부대가 우리 시민 학생들을 몽둥이로 개처럼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광주를 지킵시다. 광주시민을 살립시다.”

박효선은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여자들이 방송하는 차는 집 앞으로 오지 않았다. 공수부대가 숙영하는 조선대 종합운동장이 부근이므로 저격당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방금 방송했던 여자가 아리랑을 개사해서 고운 목소리로 불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시민 여러분 십리도 못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꽃같이 어여쁜 우리 형제들은 무자비한 계엄군에 끌려서 죽음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여자의 청아한 목소리는 가슴을 후볐다. 목소리를 강하고 약하게 조절하면서 이부자리 속의 시민들 마음을 격동시켰다. 특히 노래 실력이 녹록치 않아서 개사한 아리랑이지만 끝까지 귀를 기울이게 했다. 박효선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여자들의 방송이 사라질 때까지 들었다. 전라도와 서울 말씨를 간간히 섞어 쓰는 더 젊은 여자의 목소리도 단단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젊은 여자는 시위학생의 메모를 건네받아 그대로 읽는지 더욱 자극적인 말투였다.

“어머니, 아버지. 따뜻한 방에서 어떻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공수들이 광주시민의 씨를 말리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다 죽어가고 있고, 사람들이 광주를 오고 싶어도 차단이 되어 오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빨리 나오시어 광주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목숨을 내걸고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광주 외곽에는 많은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답니다. 이 방송을 들은 즉시 도청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박정희 양아들이라는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니 광주시민이 막아야 합니다.”

서울 말씨를 간간히 구사하는 여자는 시위학생이 건네준 메모를 다 읽고 나서는 ‘선구자’ 같은 가곡을 부르기도 했다. 방송 사이사이에 부르는 노래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방송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시민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박효선은 담배꽁초를 던지며 무릎을 쳤다. 신문이나 공중파 방송 매체가 광주상황을 왜곡보도하거나 침묵하고 있었으므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일을 자신도 해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두 여자의 방송은 한 지점에서 오랫동안 하다가 한참 만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버렸다. 두 여자는 32세의 전춘심과 21세의 차명숙이었다. 자정 무렵에는 용달차로 가두방송을 했는데 지금은 버스를 타고서 시가지를 누비고 있었다.

전춘심과 차명숙이 처음 만난 곳은 금남로 시위 현장에서였다. 시위청년 학생들에게 민가에 들어가 물을 떠서 날라 주다가 만났다. 부잣집 주인은 두 여자에게 갈아입을 옷을 내어주기도 했다. 밤11시가 너머 공수부대 계엄군이 숙영지로 철수할 무렵이었다. 시위학생들이 가두방송을 하자며 금남로 거리에서 모금했다. 잠시 동안에 45만원이 모아졌다. 차명숙은 남학생 대여섯 명과 계림전파사로 갔다. 계림전파사 주인을 만나 차명숙이 사정했다.

“아저씨, 앰프 좀 빌려주세요. 방송으로 알리지 않으면 광주시민이 다 죽을 수 있어요. 지금 빌려주시면 내일 이 시간쯤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맡기라고 하면서 앰프와 확성기를 꺼내주었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앰프와 확성기, 전깃줄을 들고 걸으면서 차명숙에게 마이크를 주었다. 그때 전춘심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런데 빌려온 앰프가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최루탄에 고장 나고 말았다. 다른 전파사를 찾았지만 한밤중이었으므로 모두 셔터가 내려진 상태였다. 대학생들이 동사무소에 앰프와 확성기가 있을 거라며 학운동사무소로 가자고 제안했다. 전춘심과 차명숙, 그리고 대학생 대여섯 명이 금남로에서 학운동사무소로 걸어갔다. 전춘심이 숙직하는 공무원에게 앰프와 확성기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직 공무원이 공공기물을 마음대로 떼어줄 리 만무했다. 전춘심은 강제로라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앰프를 갖고 갑시다.”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앰프와 확성기를 떼어내는 동안 전춘심은 숙직 공무원에게 7만원을 주었다.

“우린 도둑이 아니라 시위대를 돕기 위해 방송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호주머니 속에 있는 전부를 드리고 갈게요.”

대학생들은 앰프와 확성기를 들고 차명숙은 옆에서 방송을 하는데 도왔다. 마이크를 잡은 전춘심은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도청 앞까지 걸어가면서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용달차로 돌아다니면서 방송하라고 제의했다. 수배해온 용달차에 오르자 전시가지를 누비며 방송할 수 있었고 힘이 덜 들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자 봄비가 찔끔찔끔 내렸다. 용달차 짐칸에 탄 대학생들이 찬비를 맞으면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어디선가 버스를 구해왔다.

전춘심과 차명숙에게는 꼭 필요한 대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이 방송 멘트를 메모지에 적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전춘심과 차명숙은 돌아가면서 방송을 하다가 목이 쉬면 대학생에게 맡기곤 했다. 쉬는 동안 자신들의 과거도 졸음을 쫓기 위해 슬쩍슬쩍 나누었다. 처음에는 가명을 쓰고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서로의 진심이 느껴져 털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춘심이 먼저 말했다.

“나는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태어났어요. 사택은 아버님이 보성군 율어면 지서장과 면의원을 지냄서 덕을 쌓았기 때문에 면민들이 지어준 거라는디 시방도 그런 줄 알고 있제. 어머니가 오빠를 낳은 지 8년 만에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나는 버릇없는 귀염둥이 외동딸로 자랐는갑서. 예술적 재질이 있었는지 나는 여섯 살부터 무용을 시작해 국민학교 다닐 때는 창을 배우고 웅변 흉내도 냈어. 중학교를 다닐 때 ‘춘심’이라는 이름이 기생 이름 같다 해서 ‘옥주’라고 바꾸어 썼는디 그때부텀 사람들이 나를 전옥주라고 불렀제. 공부는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보성 예당고등학교에 입학했는디 남녀공학인 데다 깡패들이 많은께 무서웠거든. 그래서 이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제. 으디서든 무용을 계속한 덕분에 무난히 원광대 체육학과에 진학해서 무용을 전공했어. 그런디 4학년 때 학내문제로 데모하다가 제적당했어. 별 수 있어? 학사증 ?이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무용학원 강사로 돌아댕기다가 1980년에는 김제에서 자취함서 아예 무용학원에 취직하려던 참이었제. 그때는 식구들이 광주로 집을 옮겨 매주 광주에 내려오곤 했어. 어저께 일인디 벌써 메칠 지난 것 같그만잉. 서울에 있는 이모님 댁에 갔다가 열차를 타고 송정리에 밤 9시 30분쯤에 도착했던 내가 시방 여그서 방송하고 있응께 말이여.”

전춘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학생이 물었다. 방송 메모를 적어주곤 하던 대학생이었다.

“누나, 송정리서 여그까지 바로 와부렀소? 계엄군들이 있었을 것인디 아따, 용감허요잉.”

“애께나 먹었제. 송정리에서 5천원에 자가용영업차를 타고 광주로 들어오는디 광산군 서창검문소에서 검문을 하등마. 거그 군인들이 ‘통행금지 시간이니 광주시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관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가시오.”라고 해. 나는 군인에게 사정사정했제. 우리 집은 화정동 통합병원 옆에 있응께 시내까지 안 들어간다고 말이여. 사실은 밤 11시에 금남로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거든. 내가 통사정을 헌께 군인이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주더라고. 그래서 트럭 운전수에게 담배값을 주고 집으로 갔제. 집에 가니 난리가 났으니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식구들이 닦달하대. 고양이맨치로 몰래 금남로를 나왔제. 나는 불의를 보믄 참지 못하는 성미인갑서. 충금지하상가에 이르렀을 때 깜짝 놀랬거든. 도로에는 벗겨진 신발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시위청년 학생들이 공수들에게 붙잡혀 무자비허게 당허고 있드라고. 그래서 여그 상냥한 차명숙이를 만나 시위에 가담허다가 가두방송을 나섰제.”

차명숙은 여대생 또래로 발랄하고 상냥했다. 동행하는 대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소개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전남대 영문과 2학년 재학 중인데 나주 천주교 성당에 숨어 있다가 아가씨처럼 화장하고 광주로 들어와 시위대에 가담했다고 전춘심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것이다. 성당에서 신부들에게 현시국상황은 물론 부마항쟁까지 들어서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식견은 여대생 이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여대생이 아니었다.

“저는 담양 창평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댕기다가 서울 은평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은평동에 살던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해서 저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어요. 제가 광주로 내려온 것은 15살 때였죠. 이종사촌 오빠가 사진관을 운영했는데 사진기술도 배울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내려왔어요. 돈이 좀 모이자 광주천 옆에 있는 국제양재학원을 다녔죠. 79년 겨울 무렵이에요. 오빠 집에서 학원 기숙사로 옮긴 지 1개월 됐을 때 80년 5월 난리가 터졌어요. 광주에 난리가 나자 학원도 문을 닫았죠. 학원을 댕기면서 월산동 성당을 열심히 다녔는데 광주가 시끄러워지면서 저는 나주 성당으로 내려가서 3일 동안 있었죠. 다시 광주로 올라오는 날은 비가 왔어요. 18일 오후쯤부터 시위 구경을 댕겼죠. 그때까지는 제가 방송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근디 대학생 하나가 방송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방송을 하면서 저는 죽을 각오로 했어요. 죽으면 이름을 보고 찾아낼 수 있다고 해서 저도 옷에다 이렇게 이름을 썼거든요. 제가 사회현실에 빨리 눈을 뜬 것은 김성룡 신부님 덕분이죠. 청년신자 단합대회 할 때 김 신부님께서 부마항쟁을 얘기하셨고 특히 우리나라 언론은 반만 믿어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기억에 남아요.”

차명숙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동안 전춘심은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당과 신부를 얘기하는데 자신은 스님과 절과의 인연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절에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은근히 그쪽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춘심은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공수들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데 잠이 옵니까? 광주일고 앞에서 여대생이 대검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슴이 드러난 채 죽어 있었습니다. 흰 블라우스가 붉게 물들어 죽어 있었습니다. 공수들이 흉악무도하게 여대생의 유방을 난자질했습니다.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너무도 끔찍해서 어떤 남자가 잠바를 벗어서 덮어주고 갔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러분의 딸이 대검에 죽어갔는데 잠이 옵니까? 이제는 나서야 합니다. 도청 앞으로 모여야 합니다.”

박효선은 꼭두새벽에 들은 가두방송 때문에 얕은 잠도 자지 못했다. 잠을 자기는커녕 정신이 총총하게 맑아져 생각나는 대로 대자보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에 옮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시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격동시켜야 하는데 논리와 문장의 힘이 약했다. 가두방송이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대자보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여럿이 머리를 짜내야겄그만. 내 문장력은 형편?어. 그래도 내 몫은 대자보 작성이제 돌멩이를 들고 공수들과 싸우는 것은 나와 안 맞아.’

메모했던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진 박효선은 방문을 열었다. 주변의 사물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밤새 오는 둥 마는 둥 했던 찬비가 슬그머니 그치려 했다. 목덜미를 움츠리게 했던 가을비 같은 봄비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