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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월 16일 ‘경찰과 학생’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국장님께서 바쁘실 테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겄습니다. 어제 대학생
시위행진을 보호해주신
경찰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안병하 경찰국장은
박관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2019년 10월 10일(목) 04:50
삽화;이정기
전남경찰국은 도청 본관건물 뒤쪽에 있었다. 박관현은 총학생회 간부를 앞세우고 전남경찰국을 찾아갔다. 혼자 가지 않고 총학생회 간부와 동행했다. 경찰국장을 면담할 때 주고받은 이야기를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기억해야 할 것 같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전남경찰국 정문에서 경찰에게 용건을 이야기하고 학생증을 내밀자 출입증이 바로 나왔다. 경찰국 건물 안의 분위기는 다른 관공서와 달랐다. 국장실로 가는 복도는 형광등이 켜져 있었지만 조금 어두침침했다. 최근에 페인트칠을 한 듯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박관현은 총학생회 간부를 흘깃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랬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님, 잘 되겄지라잉.”

“어저께 우리들 시위를 보고받았을 것인께 잘 되겄제.”

박관현이 말한 ‘우리들 시위’란 어제의 광주학생연합시위를 뜻했다. 한 마디로 평화시위였는데, 질서정연하게 시작해서 불미스런 사고 없이 마무리했던 것이다. 경찰은 전날과 달리 가두진출을 제지하지 않았다. 치안본부가 5월 초에 전언통신문으로 교문에서 막지 말고 도심권에 저지선을 설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이는 학생들이 관공서 밀집지역이나 도심권에서 시위를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도경 상황실장이 상부의 통신문을 즉시 보고하자, 안병하 경찰국장은 “큰일 났다. 왜 그런 지시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몹시 심각해했고, 상황실 경찰들도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 같다고 수군거렸던 것이다. 경찰의 교문 저지는 통상적인 시위관리였으므로 그런 지시는 이상하고 괴이한 일이 틀림없었다.

경찰국장실 앞에 선 두 학생은 잠시 기다렸다. 제복을 입은 경무계장이 경찰국장실을 들어갔다가 나온 뒤에야 안내를 받았다. 안병하 경찰국장이 두 학생을 소파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안병하 경찰국장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체격이 단단했다. 그러나 얼굴형은 부드러워 강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복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박관현의 모습은 안병하 경찰국장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평범한 대학생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국장님께서 바쁘실 테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겄습니다. 어제 대학생 시위행진을 보호해주신 경찰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안병하 경찰국장은 박관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박관현이 다시 말했다.

“오늘 시위는 특별합니다. 저녁에 횃불행진을 할라고 합니다. 질서를 더욱 철저히 지켜 방화 같은 불미스런 사건이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겄습니다.”

“시위를 날마다 할 것인가? 서울은 어제부로 끝냈다고 하던데.”

“그저께 14일 시위는 학내집회만 할라고 그랬는디 정문서 경찰 분들이 과잉저지를 한 탓에 가두시위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사실 민주성회는 어제와 오늘 양일만 할라고 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이군.” “최규하 대통령께서 민주화 정치일정만 분명하게 밝혀주시면 학생들이 으째서 거리로 나오겄습니까?”

박관현은 안병하 경찰국장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왠지 큰형님 같은 느낌이 들어 다소 장황하게 말했다. 총학생회 간부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횃불시위를 기획한 이유는 오늘이 5.16쿠데타 19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므로 ‘5.16화형식’까지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경찰국장이라 하더라도 학생의 입에서 ‘5.16쿠데타, 5.16화형식’이라는 말이 나오면 호의적인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해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횃불시위에서는 질서유지조에다 수거조까지 짰응께 불상사는 ?을 것입니다.”

“약속하겠나?”

“예, 국장님.”

“내가 전화해 놓을 테니 세세한 것은 서부서장을 찾아가서 부탁하게.”

학생시위가 있을 때 전남대는 서부경찰서, 조선대는 광주경찰서가 맡아 관리했다. 박관현은 경찰국장실을 기분 좋게 나왔다. 박관현이 말했다.

“국장님께서 우리 입장을 이해해 주시는그만.”

“지금 바로 서부서장님을 만나봐야겄습니다.”

전남경찰국 건물 정문을 나와서야 총학생회 간부가 마음이 놓이는지 웃으며 말했다.

“아따, 국장실에서 가슴이 무자게 콩닥콩닥 뛰어부렀그만요.”

“죄 진 것도 ?는디 뭔 소리여.”

“형님 입에서 뭔 소리가 나온다냐 허고 그랬당께요.”

“내가 틀린 말을 해부렀는가?”

“형님이 5.16쿠데타 어쩌구저쩌구 얘기헐 것 같아 그랬지라.”

“그런 말을 아무 디서나 허겄는가. 경찰도 박통허고 한 통속이었는디. 국장님도 육사 출신이라고 허드그만.”

“육사 출신도 경찰 간부가 되는갑소잉.”

박관현의 말대로 안병하 경찰국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그는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했고, 6.25전쟁 때는 6사단 포병대 장교로서 춘천, 홍천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62년 중령으로 예편했다고 전해졌다. 예편 다음날 특채로 경찰 총경이 됐고, 이후 여러 곳의 서장을 거쳐 경무관으로 진급, 강원경찰국장, 치안본부 경비과장, 경기경찰국장에 이어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아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병하 경찰국장은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경찰 간부인 셈이었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고 안병하 경찰국장은 생각했다. 그제도 안병하 경찰국장은 시위현장에 있는 기동대 1중대장에게 무전으로 안전한 집회관리와 시위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시했다.

“시위 진압시 안전수칙 잘 지키기를 바란다. 시위 학생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 도망가는 학생은 쫓지 말라. 시민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 알겠는가?”

기동대 2중대장에게도 무전으로 지시했다.

“부대 지휘관은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라. 사과탄은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 알겠는가?”

어제 국장 주재회의에서도 서장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시위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라.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하라.”

이밖에도 도경국장실에서 일선 지휘관에게 수시로 무전지시를 내렸다. 이를테면 이런 지시들이었다.

<학생에 대하여 부상 및 희생자 없도록 최대한 노력, 상황판단과 정보적 조치사항 수시 보고, 시민에게 겸손함으로써 불쾌감을 주는 일 없도록 할 것, 소방차 등 비상동원하여 적절히 활용할 것, 단 유색수 살수 금지, 화학탄을 사용하지 말 것, 도주하는 학생은 추적치 말 것.>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작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른 것이 아니라 정반대였다. 도주하는 학생을 끝까지 추적하여 진압봉으로 타격하고, 화학탄을 사용하여 시위학생들의 사기를 초전에 꺾어버리고, 시민과 학생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 공수부대 충정작전의 핵심전술이었다.

박관현이 도청 앞 분수대로 나왔을 때 민주성회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분수대 주위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밀물처럼 들어차고 있었다. 전일빌딩에서 상무대, 도청 앞, 수산협동조합, 전일빌딩 맞은편인 YMCA건물 앞까지 들어찬 시위인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총학생회의 또 다른 간부가 박관현에게 다가와 흥분한 채 말했다.

“방금 어떤 경찰이 말하는디 8천 명이라고 합니다.”

“경찰 계산이 그라믄 3만 명은 되겄제.”

“그라고 쩌그 있는 서부경찰서장이 형님 쪼깐 보자고 헙디다.”

“경찰국장님이 벌써 전화했그만.”

“뭣이라고라, 경찰국장님헌테 부탁해부렀소?”

“좀 전에 만났는디 인상이 참 좋으시드그만.”

박관현은 노동청 방향의 도로가에서 시위진압 경찰차에 기댄 채 학생집회를 관망하고 있는 서부경찰서장에게 갔다. 안면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박관현이 웃으며 말했다.

“서장님, 수고 많으십니다잉.”

“국장님헌티서 전화 받았네.”

서부경찰서장이 한 손으로 치켜들고 있던 지휘봉을 맞잡으면서 말했다.

“국장님실에 들어가서 사고 ?이 가두행진허기로 약속허고 왔습니다.”

그러자 서부경찰서서장이 부하 간부에게 메모지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불법행위를 허지 않겄다고 각서 하나 써주게.”

“시위행진을 막지 않는다믄 얼마든지 써드리지라.”

“국장님께서 이미 허락하셨네.”

“사고가 나믄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겄습니다.”

“자네를 믿겄네.”

박관현은 그 자리에서 서장이 내민 메모지에 각서를 썼다. 메모지를 받친 노트가 얇아 글씨가 바르게 써지지 않았다.

<횃불집회와 시위를 함에 있어서 어떤 불법행위도 하지 않으며 만약 사고가 발생할 시에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서부경찰서장 옆에는 영광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경찰들도 있었다. 박관현이 각서를 써주고 나서 부탁했다.

“서장님, 횃불을 들고 행진하려는디 안전사고가 날 수 있응께 경찰이 에스코트를 해주믄 으쩌겄습니까?”

“기동대는 가두행진을 하는디 좌우로 보호하면 되고 에스코트는 아무래도 광주서에서 해야 쓰겄네.”

사부서장이 무전을 쳤다. 광주서장을 찾았다.

“광주서장님?”

“김 서장님. 말씀하시지요.”

“금남로는 광주서 관할인디 시위행진 때 광주서 경찰차가 에스코트를 허믄 으쩌겄습니까?”

“그래야지라. 금남로는 광주서 경찰차가 에스코트 허겄습니다.”

두 서장 간에 무전기 속의 대화가 큰 소리로 들렸다. 박관현은 안병하 경찰국장의 지시로 모든 협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박관현은 서부서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도청 분수대 앞으로 돌아왔다.

도청 앞 시계탑의 시계는 오후 4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탑 부근에는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봉축 탑도 보였다. 5월 21일이 초파일이었다. 시계탑과 봉축 탑 밑까지 광주에 소재한 각 대학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동신전문대, 조선대공전, 기독교병원간호전문대, 성인경상전문대, 서강전문대, 송원전문대 등 광주시내 9개 대학생과 대동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었다. 구경하는 시민들까지 모여들었다.

이윽고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 문석환의 사회로 민주성회란 이름의 시국성토대회 막이 올랐다. 첫 순서는 5.16쿠데타를 단죄하는 화형식이었다. 5.16쿠데타라고 쓴 글씨에 불이 붙자 대학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 와아!”

시위 열기는 단번에 달아올랐다. 유신체제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제적된 뒤 복학한 대학생 대표가 시국선언문을 고했다. 각 대학의 대표들도 자기 순서에 따라 선언문과 성명서, 그리고 <국군에 보내는 메시지>까지 외쳤다. 이러한 호소들이 끝나자 분수대 주위에 앉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등산 정상을 비치던 햇살이 스러질 무렵이었다. 산그늘의 서늘한 기운이 봄바람을 타고 내려와 뿌려지는 듯했다. 분수대 주위에 주저앉은 시위학생들은 어느 순간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라는 가사의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뒤이어 ‘애국가’를 부를 때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민주성회를 구경하던 시민들이 합창했다. ‘애국가’는 어느 때보다 처연한 느낌이 들었고, 모인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곧바로 ‘선구자’가 학생들 사이에서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애국가’보다 합창소리는 작았지만 그 무게는 바윗덩어리처럼 가슴을 눌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갈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박관현은 총학생회 간부들을 불러놓고 점검했다. 전남경찰국장, 서부경찰서장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횃불시위조, 기름공급조, 질서감시조, 횃불수거조 등을 맡은 간부들에게

안전사고 및 불미스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때 기독교 신자인 대학생들이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라는 가사의 찬송가를 불렀지만 시민호응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이 적었다.

오히려 수산협동조합 앞에서 화장을 짙게 하고 웅성거리던 몇몇 여자들이 ‘아리랑’을 불렀는데, 따라 부르는 이가 점점 불어나더니 장엄한 가락의 합창으로 변했다. 노동청 방향과 금남로 쪽에 들어찬 학생과 시민 모두가 부르는 ‘아리랑’은 노을이 번진 핏빛 하늘에 한스러운 가사와 달리 도도하게 울려 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