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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 인물열전] <34> 순천 민족독립운동지사 벽소(碧笑) 이영민 상
시대의 격랑에 맞선 항일운동가 벽소 이영민을 아시나요
2018년 10월 17일(수) 00:00
노년 시절의 벽소 이영민(1882~1964) 초상.
순천시 상사면 응령리 금곡마을에 있는 생가.




순천시 연향동 근린공원에 세워진 ‘순천가 마당’ 조형물.




순천 출신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1881~1964) 선생은 시대의 격랑(激浪)에 맞서 뜨겁게 살았다. 실천적인 항일 독립 운동가이면서 언론인, 교육자, 농민운동 지도자였다. 또한 판소리 선각자이자 시인, 서예가였다. 그러나 막상 순천에서 벽소 선생 이름을 아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에 둔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상은 금기시되고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벽소 이영민 선생의 생애를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호남 순천을 구경 가자. 장대(長臺)에 봄이 오니 양유천만사(楊柳千萬絲)요, 죽도봉(竹島峰)에 구름이 일어 만성명월(滿星明月)이 삼오야(三五夜)라….”

순천시 연향동 블루시안 아파트와 팔마로 사이 근린공원에는 ‘순천가(順天歌) 마당’이 조성돼 있다. 공원내 산책로에 자리한 입체 조형물에 ‘죽장망혜 단표자’로 시작해 ‘순천은 동방일대명승지(東邦一大名勝地)됨을 알겠노라’로 끝을 맺는 ‘순천가’ 가삿말 전문이 새겨져 있다. 순천시가 지난 2004년 7월에 세운 조형물(작가 이경복)로, 순천의 상징들을 벽화로 그렸다.

‘순천가’는 벽소 이영민 선생이 창작한 판소리 단가(短歌)이다. 43살(1925년)무렵에 가사 일부를 쓰기 시작해 65세(1947년)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선정과 향림사, 임청대, 옥천서원, 선암사, 천자암 등 순천의 산천과 명소 40여곳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은연중에 순천의 풍물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나온다. 순천판 ‘호남가’(湖南歌)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소 이영민 선생의 이름조차 모른다. 혹 알더라도 ‘순천가’를 작사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구한말 태어나 현대에 이르는 그의 80여년 생애가 일제강점기 시대의 격랑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며 실천적 지사(志士)로 일관되게 살아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벽소 선생님은 민족독립운동 지사입니다. 야학과 문맹 퇴치운동을 편 교육사업 선각자이고, 소작쟁의를 이끈 농민운동 지도자이고, 청년회를 조직한 청년사회 운동가입니다. 그리고 ‘조선 성악연구회’를 만들도록 한 민중문화 연구가이면서, ‘벽소체’라는 서체를 개발한 서예가이고 시인이고, 언론인이었습니다.”

이태호(79)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 대표는 오래전부터 벽소 선생에 대해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해왔다. 순천시청에서 멀지않은 이 대표 사무실을 찾아가자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이 대표가 후손과 함께 지난 2008년에 이영민 선생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줄 것을 요청하며 제출했던 공적심사 문서를 보관하는 상자였다. 이때 보훈처는 ‘(독립운동) 활동이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두 차례나 신청서를 반려했다고 한다.

벽소 선생은 1882년 순천시 상사면 응령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통찰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18세(1900년)에 관립 교원양성학교인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세(1902년)부터 순천 남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8세 때 당대 최고의 한학자였던 김광필 선생 문하에 들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벽소체)를 개발했다.

이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오세창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이곳에서 벽소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정기를 보존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33세(1915년)에 귀국한다.

그는 38세(1920년)부터 순천에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또 순천 부호 박승휘와 손을 잡고 순천 남학당(현 순천 남 초등학교)으로 공립 인가를 받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청년회 활동과 일제와 결합된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횡포에 맞서 소작쟁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42세(1924년)때 동아일보 순천지국 기자로 일하게 된다.

이런 그의 활동은 일본 경찰의 관찰대상이 됐다. 1927년에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진 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이듬해 2월 13일 경성 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때 죄목은 청년운동을 선동하기 위한 순천의 조직 책임자라는 것과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 혐의였다. 10개월을 복역하고 같은 해 12월 28일 출옥한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이때 지은 한시 ‘영어추감’(囹圄秋感)을 통해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농가의 빌린 땅이 빚이 되어 돌아오니(農家借地還成債)/ 가을의 수확이 여러 날이나 매우 어렵네(收擴猶難數月支)/ 어허 옥중에 있으면 세 낱의 밥인데(惟有獄中三粟飯)/ 어찌 차가운 집에 밥을 짓지 않을 때와 같으랴(何如寒屋不炊時).”

그가 지은 한시 130여 편을 모은 ‘벽소시고(碧笑詩考)에 실린 5언 18행의 ’소작인의 눈물‘(小作淚)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채소 죽으로는 배를 채우기가 어렵더라(菜粥難實腹)/ 이웃의 여우는 또 심은 것을 빼앗아가니(狐又奪耕)/ 문에 들어서자 처자식의 곡소리가 들리네(入門妻子哭)…”

이철우 연세대 법대 교수는 2006년 8월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한 ‘일제강점기 순천농민운동의 재조명’ 심포지엄에서 ‘순천 농민운동의 배경과 전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순천 농민운동은 1922년 12월 서면의 집단적 소작쟁의에서 시작하여 1934년 12월 순천 농민조합의 공식 해산에 이르기까지 12년에 걸친 민중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벽소는 출옥한 후 조선문화 말살 정책을 펴던 일제에 맞서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한 문화운동에 주력한다. 1935년 순천 부호였던 우석 김종익(1886~1937·순천대 설립자)으로 하여금 ‘조선성악 연구회’ 건물을 마련할 수 있도록 후원을 권유하고, 판소리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해방 이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치안유지법에 의한 투옥자’로서 관찰 대상이 돼 정치적 탄압에 시달리다 고향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다. 1960년 병세가 악화되자 순천으로 돌아왔고, 1964년 3월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성군 진원면 산동리 선영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자 벽소는 시를 지었다.

“애국하며 오래 살아 망명하는 장부가 되어(愛國胡爲亡命夫)/ 처를 데리고 금화를 쌓고 새벽에 길을 떠났네(帶妻包貨出晨途)/ 독재의 남은 치적은 민생고이고(獨裁洪蹟民生苦)/ 떠나간 뒤에 온 나라에 한 방울 눈물 없구나(去後全邦一淚無).”

/글·사진=송기동 기자song@kwangju.co.kr

/순천=김은종 기자 ej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