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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15) 조르바는 어두운 가슴에 불 켜준 영혼
조르바의 영혼, 그리스에만 있는 것 아니었네
2017년 11월 16일(목) 00:00
지중해 바닷물이 드나드는 멜리사니 호수동굴과 코발트블루 물빛.
이번 탐방의 부제라면 ‘지중해 물빛을 따라서’였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바닷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여정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 같다. 카잔차키스의 분신인 조르바 영혼을 탐구하는 여정이었는데, 이제라도 부제에 소홀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때마침 우리 일행이 들른 곳은 케팔로니아 섬에서 유일한 드로가라티(Drogarati) 종유석 동굴이다.

동굴 입구에 낯익은 나무들이 보인다. 상수리나무다. 여기서는 벨라니디라고 부르는데 열매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군다. 상수리나무 열매가 11월 중순이라는 계절과 시간을 환기시켜 준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은 습도가 매우 높다. 종유석들이 붉은 빛을 띤 채 동굴천정에 매달려 있다. 붉은 고드름이라고나 할까, 동굴바닥에 솟은 다양한 형상의 종유석도 있다. 케팔로니아 섬의 속살이 대부분 석회암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다 알다시피 석회암은 어패류가 퇴적돼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케팔로니아 섬의 전생(前生)은 바다 밑이었다고 봐야 한다.

문득, 지중해 물빛의 비밀이 하나 풀어지는 느낌이다. 국내에서 어느 신문에선가 지중해 물빛이 아름다운 까닭은 석회암 성분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석회암 성분이 녹아 있는 바다는 햇빛과 수심에 따라서 스카이블루, 에메랄드빛, 코발트블루, 터키블루 등 다양한 색으로 비친다는 기사를 보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 와서 보니 그렇다.

동굴을 나온 일행은 다시 사미(Sami) 포구로 가고 있다. 님프 요정이 산다는 멜리사니(Melisani) 동굴로 가기 위해서다. 지하로 들어가 나룻배를 타고 다녀야 하는 동굴이니 말하자면 호수동굴이다. 은사님께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어제 못다 하신 강의를 하신다. 마지막 강의인 것 같다. 소피스트에 대한 강의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란 작품이 있는데, 소피스트 학교 교장은 소크라테스. 당시 사회상을 풍자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교장으로 등장시켰을 터.

“그 당시 비극이 성행했지만 희극도 발표가 됐는데 대표작가가 아리스토파네스였어요. 기사한테 물어보니까 이름만 알아요. 〈구름〉이 어떤 작품이냐 하면 어느 심보 고약한 아버지가 아들을 소피스트 학교에 보냈어요. 우리가 소피스트 하면 궤변을 생각하는데 그때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이론, 철학적인 지혜를 주장하는 철학자를 말했어요. 나중에 너무 공식주의에 빠지다 보니까 궤변이 됐지만. 그런데 소피스트 학교 교장이 누구냐면 소크라테스예요. 작가의 저의가 있어요. 설정을 아주 고약하게 한 거지요.”

소피스트가 원래는 ‘지혜로운 자’ 혹은 ‘현명하고 신중한 자’를 뜻했지만 나중에는 설득을 잘하는 논변가, 웅변가로 변질되면서 ‘구름’은 그 위악적인 면을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사채 많은 아버지가 아들을 소피스트 학교에 보냈어요. 어떻게 하면 고소를 하고, 사채를 떼어 먹을까 하는 것이 아들을 취학시킨 목적이었지요. 어느 날 아들이 졸업하고 돌아왔어요.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서 하녀들한테 도련님이 왔으니 음식상을 차려라, 술 가져오라 했지요. 부자간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데 그때 아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학교에서 많이 배웠는데 ‘아버지 좀 맞아야겠어요.’ 하는 거예요. 아들이 때리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깜짝 놀랐지요. 아들의 얘기인즉 어릴 때 아버지가 자기를 때렸으니까 이제 빚을 갚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네 할아버지가 나를 때렸고 나는 너를 때렸으니 너는 네 아들을 때리면 된다.’고 반박했지요. 그러니까 아들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아들을 낳을 수도 있고 안 낳을 수도 있어요. 또 아들을 낳자마자 죽을 수도 있고, 비실비실해서 때리면 금방 죽어버릴 수도 있어요. 또 아들을 낳으려고 했는데 딸을 낳을 수도 있는 것처럼 가능성이 모두 애매하기 때문에 제가 확실하게 갚을 수 있는 건 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일밖에 없습니다.’라고 대꾸했지요.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소피스트 학교에 보낸 것을 후회하지요.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오, 제우스여. 구름이여!’ 하면서 신세한탄을 합니다. ‘구름’을 보면 변론과 웅변술이 유행한 당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어요.”

이윽고 멜리사니 동굴에 도착한 일행은 입장권을 산 뒤 지하계단을 내려간다. 과연 지하에는 거대한 호수동굴이 있다. 설명문에 의하면 지중해 바닷물이 지하로 드나드는 동굴이라고 한다. 사내가 나룻배를 저어 준다. 지금까지 봐온 어느 지중해 바다보다 물빛이 장관이다. 마치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수심에 따라 에메랄드빛이 변화무쌍하다. 수직으로 뚫린 동굴 입구에서 햇살이 쏟아져 물빛의 변화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곳에 자연의 정령(精靈), 님프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박쥐나 악령이 숨어있을 것 같던 드로가라티 종유석 동굴과는 전혀 다르다. 님프는 명랑하고 아리따운 처녀로 나타나기도 한다니 호수동굴에 신비를 보태주고 있다. 나룻배가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자 권수구 동문이 흥에 겨워 ‘마이웨이’를 부른다. 권 동문 특유의 중저음이 동굴천정에 공명되어 메아리로 촉촉하게 돌아온다.

이제 섬 일주의 마지막 코스인 미르토스 (Mrtos) 해변만 남은 것 같다. 가는 도중 은사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시지 못한 얘기를 마저 꺼내신다.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은사님의 마음이리라.

“그리스 문화에서 꼭 생각해봐야 할 게 있는데 스파르타와 아테네 체제입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잘 발전돼 우리가 가봤던 파르테논 신전에서 사람들이 모여 정치하고 토론하고 국가의 방향을 얘기했을 거예요. 그런데 플라톤이 쓴 ‘공화국’ 리퍼블릭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스파르타 모습이 나와요. 스파르타를 상당히 동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줘요. 스파르타가 어떤 곳인지 좀 생각해 보세요. 공동 취사를 했습니다. 밥을 따로따로 먹는 게 아니라 집단이 함께 밥을 먹었어요. 미국대통령이 사병들 틈에 끼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어떤 일체감이 생기겠지요. 하루 이틀 그런 게 아니지요. 집단 취사를 하면 계급적 갈등이 많이 순화돼요. 또, 국가적으로 시민사회가 검약하기 위해서 금은보화를 소지하는 걸 못하게 했어요. 한편 아이를 낳으면 국가에 바쳤어요. 무조건 바치는데 병약하고 불구인 아이는 국가가 없애버렸어요. 건강한 아이를 남녀 똑같이 국가가 데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릅니다. 국가가 뒤섞어버렸으니까 어느 집 아이인지 모르지요. 아이가 청년이 되면 국가에 공출한 집에다가 아이를 주지요. 그래서 부모들의 마음은 남녀를 불문하고 스무 살 청년과 처녀들이 다 제 자식 같아지는 거지요. 그런 이유로 부모는 모든 군인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군인은 무적의 전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을 때 남녀 모두 전라가 돼 팬티하나 입지 못해요. 남녀가 똑같이 용맹해지지요. 권한도 줍니다. 계급이 낮은 자가 상급자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1년에 한번 죽여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요. 스파르타에서는 공동노역을 하고 또 계급의 직분에 맞춰서 국가를 위해서만 헌신하게 돼 있어요. 입법자 리크루고스(기원전 800-730)가 수년 동안 크레타, 이집트 등의 정치제도의 장단점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이상 국가를 하나 세워 보려고 스파르타 헌법을 만든 거지요.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투표에 의해서 독살 당해 죽었을 때 플라톤이 왜 스파르타를 동경했는지 이해가 되는 면이 있어요.”

활처럼 휘어진 미르토스 해변을 조망하는 전망대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 이기적인 방종을 떠올려본다. 궤변과 무책임이 성행했던 기원전 아테네의 사회상을 풍자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를 생각해본다. 때마침 흰 구름 한 자락이 허공에 떠 있다. 어쩌면 시비와 집착에 빠진 우리 자신이 언젠가 ‘구름’ 속의 주인공처럼 ‘오, 신이시여. 구름이여!’ 하고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코발트빛 지중해 바닷길을 따라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 나섰던 나의 여정도 이제는 여기서 접어야 할 것 같다. 못다 들은 홍기삼 은사님의 강의도 훗날을 기약해야 할 듯싶다. 문득, 내가 만났던 조르바의 영혼이 그리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든다. 세상과 다투지 않고 존재 지향적으로 살았던 한국인 원효와 경허, 김시습과 김삿갓이 새삼 떠오른다. 조르바를 비롯한 그들 모두가 시공을 투과해 어리석은 어둔 가슴에 불을 밝혀주는 영혼들이라는 깨달음이 든다. 〈끝〉

/글·사진 정찬주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