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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6) 야니, 엘튼 존 공연 이로디온 극장에 서다
별 쏟아지는 무대 … 1800년 거슬러 낭만에 빠진다
2017년 06월 29일(목) 00:00
이로디온 극장 너머로 보이는 아테네 시가지.
배에서 이른 점심을 푸짐하게 먹는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돌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할 터이니 든든하게 먹어두는 것이 상책이다. 아테네는 제우스의 딸로 지혜를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로 불렸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계보는 단연 수승하다. 나는 배에서 내리기 전에 우리나라와 그리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본다.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 나라의 수도이다. 흥미롭게도 두 나라의 수도 위도가 비슷하다. 아테네는 북위 38도이고, 서울은 북위 37도 34분이니 거의 같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의 최고봉인 올림포스 산(북위 40도 05분)과 우리나라의 백두산(북위 41도 34분)의 위도도 엇비슷하다. 또한 올림포스 산에서는 제우스신을 비롯한 12신이 살았고 백두산에서는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었던 신성의 산이라는 점도 같다.

다 알다시피 그리스는 섬이 많은 나라이다. 서쪽은 이오니아 해, 남쪽은 지중해, 동쪽은 에게 해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섬이 많다는 것도 그리스와 우리나라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에는 6000여 개의 섬이 있는데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227개이고, 우리나라는 국토부의 2010년 1월의 공식집계에 의하면 3358개의 섬 중에서 유인도가 482개라고 하니 두 나라 모두 ‘섬 부자’인 것이다.

그리스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간관념도 비슷하다. 그리스에 ‘그릭 타임’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코리안 타임’이 있었으니까. 요즘도 그리스인들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보다 15분에서 30분쯤 늦게 나타난다는데 그들의 당연한 관습이라고 하니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크루즈터미널에서 일행이 이용할 밴을 흥정해 탄다. 나의 도반 서종만 선생이 뒷자리에 있다. 서 선생의 부인도 다소곳이 앉아 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동행하기를 자처하는 부부다. 밴은 시가지를 거침없이 달린다. 거리는 칙칙하다. 국가부도 사태를 맞은 탓인지 도심의 건물과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붉고 푸른 글씨들이 어지럽다. 조명등이 꺼진 가게들도 많다.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다. 우리도 1997년에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대량실업이라는 위기를 겪었던 적이 있다. 나 역시 15년간 다니던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었던바 동병상련인지 남의 일 같지 않다.

11월 초인데도 날씨가 무덥다. 햇살이 제법 따갑다. 밴에서 내려 아크로폴리스 매표소까지 오르는 동안 이마에 땀이 밴다. 올해 77세인 은사님이 힘들어 하신다. 마침 올리브나무 그늘에 벤치가 하나 보인다. 나는 은사님과 함께 벤치에 앉아 아크로폴리스를 우러러 본다. 등 뒤로는 아리오바고 언덕이 보인다. 젊은 남녀들이 데이트하기 좋을 법한 야트막한 돌산이지만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아테네 사람들을 선교했던 기독교도들의 성지라고 한다.

벤치에서 땀을 들인 뒤 은사님의 즉문즉답(卽問卽答)이 이루어진다. 일행 중에 내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이 서양정신이라고 하는데 맞는 이야기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은사님이 헬레니즘부터 설명하신다.

“헬레니즘의 기본은 인본주의에 있어요. 인본주의라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중심주의예요. 그리스 신전에 오면 맨 신들의 얘기가 많은데 그게 무슨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의심이 들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우스를 비롯한 12명의 신이 올림포스 산에 살면서 인간사를 토론하고 결정해요. 그리고 그 결정된 것을 아래로 내려 보내면 인간사회가 바뀌고 그래요. 거기까지는 신화의 시대가 맞아요. 근데 또 신들이 인간과 사랑하고 결혼도 해요. 그러다 보니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출생하지요. 반은 아버지를 닮은 신이고, 반은 어머니를 닮은 인간이지요. 그들은 질투도 많고, 싸움도 잘하고 그래요. 신이라고 할 때는 절대적 인격신이어서 이성에만 의존해 질투를 하거나 감정에 빠져 사랑하거나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거든요. 신이라고 개념화시키면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희랍의 신은 인간적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트로이의 목마 같은 전쟁도 일어나는 거지요.”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만 적이 있다. 신과 인간이 결혼하는 관계이니 반신반인들이 많고, 사랑과 욕망, 질투가 뒤엉켜 비극과 희극의 주인공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문화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에 있지요. 모든 철학적 기반도, 사회적 체제도, 정치적인 것들도 다 거기에 있어요. 신 중심이 아니에요. 아무튼 BC 6세기경부터 그리스문화가 꽃을 피워서 현대학문, 현대과학, 현대예술과 종교철학, 이 모든 분야가 그때 다 완성되지요.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한사람이 12개 분야에 걸쳐 천재적 업적을 남기지요. 호사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하고 괴테의 IQ를 측정해보니까 270이 넘는 걸로 나왔어요. 그가 지금 살아 있어서 활동한다면 270정도의 아이큐가 아니고서는 이처럼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길 수 없다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철학, 미학, 윤리학, 논리학, 동물학, 해부학, 문학, 예술, 조각, 건축학, 천문학 등등이에요. BC 6세기부터 시작돼서 동양을 정복한 알렉산더 때까지가 그리스문화의 전성기지요. 그리스문화는 젊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해서 인도까지 그리스문화 영향을 받지요.”

알렉산더 대왕이 끝내 인도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인더스 강 유역에 주둔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전파한 흔적을 인도여행 중에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풍의 조각미남으로 형상화한 부처의 얼굴이라든지, 중인도 엘로라 석굴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같은 석주들을 보았던 것이다.

일행은 그늘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오른쪽으로 돌아 이로디온 극장으로 가본다. AD 161년에 대부호이자 웅변가였던 집정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아내 레길라가 질병으로 죽자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극장을 지어서 나라에 봉헌했다고 한다. 속된 말로 통 큰 희사다. 그의 덕화는 1850여 년 동안이나 뮤지션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는 셈이다. 현지인들은 ‘이로디온’ 극장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다. 지금은 노천극장 형태지만 고대 아테네 시절에는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5000명을 수용하는 극장인데 무대에서 맨 윗자리까지 소리가 잘 전달된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마리아 칼라스, 볼쇼이발레, 나나무스쿠리, 엘튼 존, 조수미, 야니 등이 공연했던 극장이란다. 나는 그리스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야니(Yanni)가 지휘했던 공연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뉴에이지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야니가 조르바를 흠모해서 그랬을까? 흰색 와이셔츠와 백바지 차림에 검은 벨트를 두르고 장발을 쓸어 넘기며 신들린 것처럼 춤추듯 지휘하는 그의 모습과 음악은 고풍스런 이로디온 극장과 너무도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리스적 감각’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밖에 더 붙일 수 없는 그런 음악이었다. 클래식에다 재즈와 뉴에이지가 섞인 야니의 음악은 마치 그리스인들이 먹는 ‘라가나’라는 전통 빵에다 올리브유와 꿀이 들어간 신선한 샐러드 맛 같았다고나 할까.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밀로 만든 빵은 음악처럼 단순하면서도 영원하다고 했던 것이다. 이로디온 극장 앞으로 가보니 아취형의 창문과 거대한 문들이 나 있다. 문이 여러 개인 까닭은 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을 위한 것 같다. 극장이 수용하는 인원과 출구의 수는 비례하는 법이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신비로운 야니 음악이 꿈결인 듯 들리는 성싶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세계 최초로 지어진 디오니소스 극장이 나온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술과 풍요의 신이다. 1만 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당시로는 세계 최대의 대형 공연장으로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아이스킬러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가 바로 그들이다. 서울의 대학로 어느 극장에선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비장하게 봤던 추억이 새롭다.

/글·사진 정찬주 작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