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들여다보기] 김덕령과 충장사 - 김형주
충장공 김덕령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부친 붕변(鵬變)과 모친 남평 반씨(南平潘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모친의 임종을 위해 귀향하였다. 이듬해 모친의 상중이었지만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선조임금으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진용 편제와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배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인데다 군량도 부족해,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이후 진주에 둔전의 설치 등 전쟁에 대비하였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의병 진영에서 장기전의 대비에 따른 피로의 누적으로 군율의 기강 해이되는 사건이 빈발하였는데, 공은 1596년 일벌백계를 위해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터무니없는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껏 변론했으나 20일 동안에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꽃다운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81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장공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감옥에서 ‘마음속의 불을 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을 온몸으로 절규하였던’ 가슴 찡한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배향하였는데 이듬해 이곳에 의열사(義烈祠)라는 사액이 하사되었다.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사우인 충장사(忠壯祠)는 지난 1975년 2월 무등산의 명당으로 알려진 광주 금곡동 배재마을의 산기슭에 건립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와 함께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공(公)은 체구는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여 호남일대의 모든 씨름판의 끝판왕이 되는 등의 숱한 무용담을 남겼으며, 무술연마와 학문수양의 보금자리였던 무등산 곳곳에는 주검동 이나 뜀바위처럼 공의 발자취가 서려있다. 충장사는 광주 최고의 번화가인 충장로와 함께 장군의 드높은 절의정신을 오롯이 기억하게 해주는 장소이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 임영진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 전남대학교박물관 관장
- 호남고고학회 회장
- 백제학회 회장
그 해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터무니없는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껏 변론했으나 20일 동안에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꽃다운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81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장공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감옥에서 ‘마음속의 불을 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을 온몸으로 절규하였던’ 가슴 찡한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배향하였는데 이듬해 이곳에 의열사(義烈祠)라는 사액이 하사되었다.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사우인 충장사(忠壯祠)는 지난 1975년 2월 무등산의 명당으로 알려진 광주 금곡동 배재마을의 산기슭에 건립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와 함께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공(公)은 체구는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여 호남일대의 모든 씨름판의 끝판왕이 되는 등의 숱한 무용담을 남겼으며, 무술연마와 학문수양의 보금자리였던 무등산 곳곳에는 주검동 이나 뜀바위처럼 공의 발자취가 서려있다. 충장사는 광주 최고의 번화가인 충장로와 함께 장군의 드높은 절의정신을 오롯이 기억하게 해주는 장소이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 임영진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 전남대학교박물관 관장
- 호남고고학회 회장
- 백제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