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5> 4.19혁명 시원지 광주 금남로서 장송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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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밝힌노래]<5> 4.19혁명 시원지 광주 금남로서 장송행렬
1960년 3월 15일 대선 앞두고 폭풍전야
이승만 독재 항거 전국 첫 고교생 시국 벽보
대학생 혈서는 집단 혈서로 확산
선거날 낮 12시 45분 부정선거 첫 저항
데모노래 없던 시절, 군가 부르며 哭聲
2016년 07월 18일(월) 00:00
광주 4·19혁명은 광주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광주고 교정에 세워진 ‘광주 4월혁명 발상 기념탑’.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먹던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4·19혁명의 시원지는 광주’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야기는 1960년 3월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는 그 어느 지역보다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특히 3·15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기는 폭풍전야였다. 전국 최초로 고등학생의 시국 벽보가 시내에 내걸렸고(2월8일),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대학생 혈서도 광주에서 시작됐으며(2월27일), 혈서 항거는 집단 혈서로 확산됐다(3월4일). 선거일이 다가오자 자유당 정권의 불법과 횡포는 더 노골화됐다. 3월 9일과 10일 여수와 광산에서 잇따라 민주당원 살해사건이 발생, 3·15 광주시민봉기의 촉매가 됐다.

대통령선거일인 3월15일 낮 12시45분, 장기집권을 획책하며 부정선거를 자행한 지유당 정권에 대한 첫 저항이 광주 금남로에서 일어났다.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다.

앞서 이날 오전 9시40분께 상무대 화학학교 사병이 조직적인 부정선거에 참을 수 없어 이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화학학교 사병들이 투표용지는 손에 쥐어보았으나 기표는 교장과 부교장이 하고 투표함 앞에 참모장이 앉아 투표용지를 받아서 접어넣었다.

이 사병의 눈물의 폭로는 참관인과 민주당원, 시민들의 분노를 일깨웠다. 선거사무실에 속속들이 모인 민주당원 200여명은 백지를 사다가 백건을 만들어 쓰고 ‘哭 民主主義 葬送’이라는 플래카드를 2개 만들어 장송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낮 12시45분께였다. 민주당원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자동차가 천천히 따르며 ‘아이고! 아이고∼ 민주주의 죽었네’라고 외치며 곡을 하기 시작했다. 대열은 전남도청 경찰국을 향했다. 순식간에 1200여명이 합류, ‘민주주의 죽었네’, ‘자유당 정부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곡을 해 거리는 온통 초상집처럼 울음바다로 변했고, 시민들의 아우성은 하늘을 찔렀다.

45분가량 지난 오후 1시30분께 검은 제복의 무장경찰관이 몰려와 충돌이 시작됐다. 무장경찰은 무작정 두들겨팼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0여명이 부상했고, 30여명이 연행됐다.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1960년 3월17일자 3면)는 이렇게 보도했다.

“정·부통령선거일인 15일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각종 부정사실을 지적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이날 12시50분경 ‘곡(哭) 민주주의’라는 만장을 선두로 흰두건을 쓴 약 50여 당원들이 짚차와 트럭 그리고 일부는 도보로 이필호 의원이 앞장서서 금남로 소재 동당 부통령선거사무소를 출발, 도청 쪽으로 데모하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소리 높이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곡성을 올린 이들이 법원 앞을 조금 지나자 경찰관과 백차가 출동 제지하였으나, 이들은 억세게 데모를 계속 경찰국장 관사 앞에 이르렀다. …이날 금남로 거리에는 구경군중들이 즐비하게 줄을 이어 있다가 물세례를 받기도 했다.…”

광주 3·15 민주주의 장송 데모는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로, 광주 4·19혁명의 출발점이었다.

또 3시간 뒤 오후 3시43분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주검으로 확대된 마산 시민봉기로 이어졌고, 4·18 고려대생들의 유혈사태를 불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광주 4·19혁명은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19일 오전 10시께 학생들은 약속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선생님 광주학생의 위신을 세워야 할 게 아닙니까”라며 데모를 감행했다. 광고생 100여명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으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 전남여고·광주여고·광주일고·광주공고·조대부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가득찼다.

이어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의거 선배를 따르자’등의 구호와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 곳곳을 행진하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1000여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총격을 무릅쓰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전남일보 1960년 4월23일∼5월2일 ‘광주학생 4·19 발자취’에서)

이들은 학우의 시체를 넘으면서 애절하게 전우가를 불렀다고 한다. 전우가는 ‘전우야 잘 자라’라는 군가다. 생을 달리한 전우를 뒤로한 채 계속해서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호가 가사를 짓고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라’

‘유정천리’라는 노래는 개사해 불려졌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곡선생 뒤를 따라 / 장면 박사 홀로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 천리만리 타국땅에 박사 죽음 웬말이냐 //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선거 웬말이냐 /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 민주당에 꽃이 피네 자유당에 눈이 오네’

/박정욱기자 jw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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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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