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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염갈량’의 따뜻한 리더십과 작은 기적
2014년 11월 14일(금) 00:00
무장무애(無障無碍). 거칠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삼성의 벽은 높았다. 넥센이 졌다. 우승 문턱에서 아쉽게 주저앉았다.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다. 그 아쉬움의 무리 속에는 ‘기아에서 넥센으로 갈아탄’ 이 지역 팬들도 많았다.

그래도 잘했다. 넥센 선수의 평균 연봉은 8000만 원 남짓. 평균 연봉 1위인 삼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한국 시리즈 진출만으로도 그들은 작은 기적을 이룬 셈이다.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3S 정책’이라는 말이 처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였던 것 같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반정부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펼친 정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앞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3S 정책을 시행했다고 한다.

3S는 스포츠(Sports)·섹스(Sex)·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initial)를 의미한다. 스포츠와 섹스 그리고 영상(映像)이라는 수단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려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이 바로 ‘3S 정책’이다.

전두환 정권이 바로 그랬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전국적으로 시작된 것이 1980년. 이 무렵부터 러브호텔 허가가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이로써 불륜 커플들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만 갔다. ‘포르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1982년엔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가운데 성매매 업소가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에 각종 프로스포츠(professional sports)가 도입된 것도 80년대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이 잇따랐다. 이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운동만 해서 밥을 먹고 사는 선수는 레슬링이나 권투가 고작이었다.



‘3S정책’의 산물 프로야구



그러고 보니 프로야구의 역사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프로야구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프랜차이즈 제도(franchise system: 지역연고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광주·전남의 많은 야구팬들은 해태타이거즈(지금의 기아타이거즈)에 열광했다. 그만큼 억눌리고 소외된 한(恨)을 야구를 통해 표출했으리라. 타이거즈 또한 팬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열 번의 우승으로 보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 국보급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선동열 감독 취임 이후만 봐도 그렇다. 최근 3년간 5위에서 8위 또 8위로 추락했다. 이에 따라 ‘588’의 여자들처럼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던 선 감독은 결국 자진사퇴의 길을 걸었다.

‘명선수는 명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체육계의 속설이 있다. 현역 시절 최고의 선수가 반드시 코치나 감독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선 감독은 이를 스스로 증명하고 씁쓸하게 물러났다. 잘할 때는 모든 걸 다 줄 듯이 하다가도 못할 때는 사정없이 뭇매를 가하는 ‘갈대 같은 팬심’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선 감독이 실패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선수 시절엔 별 볼 일 없었지만 감독으로 명성을 날리는 경우를 가끔 본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올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넥센히어로즈 염경엽 감독의 예가 바로 그렇다. 그의 선수 시절 통산 타율은 고작 1할9푼5리에 불과했다. 역대 500경기 이상 출전한 타자들 가운데 최저이자 유일한 1할대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 그는 언젠가는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나 보다. ‘염경엽에게는 있고 선동열에게는 없는 것이 간절함과 노력’이라 했던 누군가의 말에 공감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염 감독이 그랬다. 이는 그가 가난했다는 게 아니라(오히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를테면 ‘루저의 눈물’ 같은 것을 말함이다.

10여 년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당시 염 감독의 직함은 현대유니콘스의 운영팀 대리였다. 요즘 드라마 ‘미생’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말단 직원. 어린 출입기자들도 대충 말을 놓는, 시쳇말로 별 볼 일 없는 샐러리맨이었던 것이다.



말단 직원에서 명감독으로



2004년 현대가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을 때 그는 롯데호텔까지 비를 맞고 뛰어가야 했다. 우승 축하연을 준비하기 위해서. 현수막을 달고 대충 준비를 마친 그는 “한숨 돌리고 나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초라했다”고 회상한다. 팀은 우승했지만 자신은 정말 슬펐다는 것이다.

말단 프런트 직원이었던 그는 어떻게 해서 제갈량에 버금가는 ‘염갈량’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절실함이다. 그라운드로 돌아가고 싶은 강한 욕구. 그는 언젠가 코치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악물었다. 구단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야구 공부를 계속했다. 밤늦게까지 남아 경기 결과를 정리하고 분석했다. 선수들과 감독의 성향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오로지 훗날 유니폼을 입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 끝에 그는 코치가 되고 감독이 될 수 있었다.

넥센 선수들의 절실함 역시 감독 못지않았다. 다른 팀에서 주전이 되지 못했던 선수들도 넥센으로 와서는 달라졌다. ‘여기서도 못하면 끝’이란 절박함을 갖고 뛰었다. 그렇게 해서 서건창 (광주일고 출신) 등 많은 영웅들(히어로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염 감독은 경기중 더그아웃(대기석)에서 내내 선 채로 작전을 지시한다. 이유가 있다.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뛰는데 감독이라고 앉아 있을 수만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만큼 따뜻한 감독이다. 그에게서 ‘미생’에 나오는 ‘오 과장’의 모습을 본다. 이 지역 팬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단지 광주일고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염 감독은 늘 자신의 공(功)을 감추고 선수들에게 공을 돌린다. “나는 결과가 안 좋을 때 책임만 지면 된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결과가 좋을 때는 자기 공만 내세우고, 일이 잘 안 되면 남의 탓만 하는 작금의 정치인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