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거기’ 찍을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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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거기’ 찍을 사람이 없다
2021년 11월 11일(목) 04:00
“도사님. 감사합니다. 도사님 말씀 안 들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뭐라 하던가요. 내 말만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하면 다 잘될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게요. 이제 한 고비 넘은 것 같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처음 도사님 말씀을 들을 때는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고?” “아니,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다니라니요? 대단히 불경스러운 말씀이지만, 할까 말까 꽤 고민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텔레비전 토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잖아요. 내 사랑하는 마누라가 믿고 의지하는 도사님 말씀을 안 따를 수도 없고. 손바닥 글씨 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습니다.” “흠, 만약 그렇게 했으면 별 효험을 보지 못했을 거요.”

“그러게요. 하여튼 그 손바닥 글씨가 공개되자 난리가 났었지요. 도대체 ‘저 친구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알 수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조금 용감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무식하다니요? 고시에 수없이 떨어지긴 했어도 명색이 서울대 출신 아닙니까, 제가. 당치 않은 소리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 괘념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주술입네 미신입네 여기저기서 공격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납니다.”

“그래요.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련도 없이 한 나라의 왕좌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예. 그래서 저도 온갖 수모를 참고 견뎌낸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21세기에 웬 미신?’이냐고들 다그칠 때는 뭐라 답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지지자가 써 준 거라고 대충 얼버무리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 참. 그러다가 ‘국민을 왕처럼 극진히 모신다’는 뜻이라는 어느 네티즌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캬!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정말 기막힌 생각 아닙니까. 이걸 진즉 알았더라면 토론에서 한 번 써먹었을 텐데….”

자질·도덕성 다 믿음 주지 못해

설마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재미 삼아 꾸며 본 가상의 대화일 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가 이랬을 리는 없다. 그래도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본 것은 실제로 정치인들이 간혹 미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도 남편의 일정과 안전을 점성술사에게 의지했다지 않은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직원을 채용할 때 면접 자리에 관상쟁이를 들여 놓고 지원자의 관상을 보게 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샜다. 어찌 됐든 ‘손바닥 글씨’의 주인공인 그 후보가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하지만 그는 숱한 실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살얼음을 밟듯(如履薄氷) 매사에 조심해도(戰戰兢兢) 부족할 판에 잦은 말실수로 눈총을 맞았다. 특히 ‘전두환 옹호’ 발언은 호남의 분노를 자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언행으로 국민에게 상처를 안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른바 ‘본부장’(본인·부인·장모) 의혹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런 각종 악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는 제1야당의 대선 후보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확산이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윤 후보의 지지율은 대체로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과 반비례하는 패턴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동산 가격 폭등과 재산세·종부세 등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 부동산 관련 세금은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얼마 전 만난 한 친구도 그랬다. 그는 서울에 갖고 있는 집 한 채의 세금이 너무 올랐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과거 직장 생활 할 때 6억 원 정도 주고 산 것이라는데 근래 집값이 20억 원 이상으로 오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년에 몇십 만 원에 불과했던 재산세가 300만 원까지 치솟았다며 푸념을 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살아서는 보유세, 물려주면 증여세, 사후에는 상속세’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심지어 ‘상속세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종부세 때문에 살지도 못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그나마 ‘덜 나쁜 후보’ 고르라니

흔히 ‘세금을 대폭 올리고 선거에서 이긴 정권은 없다’고들 한다. 한데, 이를 어쩌나? 지금 ‘조세 저항’(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의 흐름은 최고조여서 현 정부에 대한 불만도 그야말로 ‘묻지 마’ 수준이다.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열망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윤 후보는 ‘문 대통령의 반사체’라는 평이 말해 주는 것처럼 그는 이러한 반문 정서에 기대어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제 여야 대선 후보가 모두 결정됐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상당한 흠결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도덕성 면에서는 어느 한 쪽이 우위를 점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거기서 거기다. 심지어 대장동 의혹과 고발 사주 의혹으로 각기 수사 대상에까지 올라 있다. 둘 중 하나는 ‘청와대가 아니라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음주 운전자와 초보 운전자 중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라는 말에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그러니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물론 사표(死票) 방지 심리 때문에 원하지 않는 후보를 찍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뽑을 사람 없는 비호감 대선’이라는 탄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겨우 파출소 피했더니 경찰서가 버티고 있고, 연기 피하려다 불구덩이 속에 빠질 수 있는 형국이다. ‘쓰레기차를 피하고 보니 똥차를 만난다’는 말은 너무 과한가.

이럴 때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최선’(最善)이 아니면 ‘차선’(次善)을 선택하라고. ‘제일 좋은 사람’이 없다면 그나마 ‘다음으로 좋은 사람’을 택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이야기가 됐다. 요즘엔 ‘최악’(最惡)을 피해 ‘차악’(次惡)을 고르라고들 한다. ‘제일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덜 나쁜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다. 그만큼 찍을 후보가 없다는 얘기다.

대선이 4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정권 교체냐 정권 재창출이냐? 운명의 날은 시나브로 다가오는데, 우리들의 고민은 마냥 깊어만 간다. 이쪽을 찍자니 이게 걸리고, 저쪽을 찍자니 저게 찜찜하다. 문득 창밖을 보니 가을바람에 낙엽이 휘날리고 있다.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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