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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불타는 비엔날레 현장’을 그대 보았는가
2014년 10월 31일(금) 00:00
몇 년 전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 그림 한 점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한국화(동양화)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서양 물감을 사용한 유화였다.

전통적인 수묵화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를 서양화라 해야 하나 동양화라 해야 하나? 그나저나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누구일까? 낙관을 보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남농(南農) 허건 화백의 제자 전정(田丁) 박항환(67)이었다.

진도 출신인 그는 21세 때 국전에 입선한 이후 4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왔다. 먹과 한지를 바탕으로 하는 전통 수묵화에 현대적인 감성을 더해 개성 강한 자기만의 예술양식을 완성해 냈다는 평을 듣는다.

그동안 작가로서의 명성도 얻을 만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파격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동양의 전통 재료인 수묵담채와 서양의 현대 재료인 아크릴을 혼합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과 창신(創新)이라는 대립적인 가치의 절묘한 조합이라 하겠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새로움을 추구한다. 다름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다름’과 ‘새로움’의 극치가 모여 있는 곳이 아마도 비엔날레가 아닌가 싶다. 비엔날레에 가면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을 만날 수 있다. 다소 엉뚱하고 다소 생소하기도 하며 그래서 난해한가 하면 때로는 기발한 작품들이 거기 모여 있다.

광주비엔날레 제3전시실의 끝자락. 실내는 텅 비어 있다. 벽에 뚫린 조그마한 창 하나가 보일 뿐. 그래도 어딘가에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야 일반인들도 짐작할 수 있다. ‘비엔날레 20년’의 세월이 관람객들의 수준을 그만큼 높여 놓았을 것이기에.



느껴라, 작품이 별것이더냐



놀랍게도 작품은 바로 벽에 뚫린 평범한 창문이었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 형태를 그대로 따라 만들었는데 전시실 건물의 벽을 일부러 부수고 새롭게 짜 넣었다 한다. 창밖으로는 실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보이는 아파트까지 작품인 셈이다.

도슨트(전문 안내원)는 “한국 사회의 획일화된 주거환경을 경계한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비엔날레가 끝나면 이번에 일부러 뚫어 놓은 그 창문을 다시 막을지 여부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렇다고 비엔날레에 이런 어려운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파사드(건축물의 정면)에 그려진 ‘트롱프뢰유’ 즉 ‘눈속임 그림’이다.(건물 외벽에 그려졌으니 이번 전시에서 누구나 공짜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일 것이다.)

문어 대가리에서 전직 대통령을 연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어가 건물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관 같은 물리적인 장소에 반대해 온 미술운동의 역사를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욕심일 뿐. 우린 그저 작품을 보면서 각자 나만의 느낌을 갖는 것으로 족하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뜻밖에도 80년대 미국 팝송 제목에서 따온 ‘터전을 불태우라’이다. 마침 전시장에 들어서서 만난 첫 작품이 ‘불타는 창문’이었다. 방 안은 온통 캄캄한 어둠인데 한쪽 벽면에 끼워 넣은 창문 안에서 붉은 색 빛이 깜박인다. 마치 집이 불타는 것 같기도 하고 창밖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을 보면서 불타는 지옥을 연상하든, 아름다운 벽난로의 따뜻함을 느끼든, 상관없다. 그것은 관람객의 자유이니까.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작품도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8점의 ‘이불 시리즈’. 이 작품은 우리의 전통 속담인 ‘수박 겉 핥기’, ‘땅 짚고 헤엄치기’, ‘누워서 떡 먹기’ 등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관람객들로서는 그림을 보면서 속담을 알아맞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누려라, 헐값의 ‘문화적 허영’



‘일곱 개의 미닫이문’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좋아할 것 같다. 좌우로 열리는 자동문엔 거울이 부착돼 있어 관람객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비춘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끝없는 통로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작품의 주체가 된다.

중국 작가의 ‘쓸모없는’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흥미롭다. 작가는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지금은 아무 필요 없게 된 물건들을 가져오도록 했다. 소파·접시·냄비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모여 작품이 되었다.

그 중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커플링 반지’가 눈에 띈다. 한때는 불타는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왜 소중한 반지를 버린 것일까. 사랑은 유한하니까,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누군가 유치하다 할지 모르지만 ‘느끼는 것은 관람객의 자유’ 아닌가.

불타는 것은 단풍만이 아니었다. ‘불타는 비엔날레’ 현장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돌아보았다. 예술은 ‘다름’이요 ‘새로움’이요 ‘연민’이라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도 확인한다. 현대미술 역시 시(詩)가 그러하듯이 상징과 비유를 먹고 산다는 사실도 알겠다.

이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광주비엔날레도 막을 내린다. 일상의 삶이 팍팍할수록 더 늦기 전에 가 보자. 1만4000원(입장료)의 헐값(?)으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적 허영’을 왜 마다하는가.

(아, 이것만은 꼭 봤어야 했는데 시간에 쫓겨 그만 나오고 말았네.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 특별 프로젝트 ‘달콤한 이슬전’. 그 중에서도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던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전장(戰場)에서 잃었던 어머니로서의 콜비츠를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아직 시간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