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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뒤늦게 나온 대통령의 눈물 한 방울
온 세상 부모들 다 울었는데
2014년 05월 23일(금) 00:00
얼마 전 눈물로 쓴 편지 한 장이 언론에 공개됐다.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학생의 짧은 편지였다. “차웅아! 1년 전부터 널 좋아했었어.” 처음 그렇게 시작한 편지는 “사랑한다고 고백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 오는 거야”라는 탄식으로 이어진다.

“내 고백 받아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깐 어서 돌아와…. 그냥 옆에서 몰래 바라만 봐도 난 행복하니까 제발 돌아와.” 안타까움은 계속된다. “그냥 쳐다볼 기회라도 줘! 그만 애태우고 어서 돌아와 줘…. 너의 그 환한 웃음, 보고 싶단 말이야.”

차웅이! 배가 침몰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순간 구명조끼를 다른 이에게 벗어주었던 아이.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몸을 던졌지만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바로 그 아이.

남몰래 차웅이를 흠모했던 여학생은 편지 마지막에 후회의 심정을 토로한다. “진작 사랑한다 말할 걸. 진작 좋아한다 고백할 걸…. 너무 후회돼. 보고 싶어 차웅아….” 꽁꽁 감춰 왔던 이 고백은 단원고 낮은 담벼락 한편에 걸렸다. 바닷속에 잠긴 차웅이에게 끝내 전달되지 못한 채. 우리는 그런 안타까운 사연 하나하나가 전해질 때마다 눈시울을 적셨다.

“하늘나라에선/ 자라나면 죄 짓는다고/ 자라나기 전에 데려간다 하느니라/ 죄 많은 아비는 따 우에/ 남아야 하느니라”(김종삼의 시 ‘음악’ 일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에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던 착한 학생들. 하늘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행여 죄 지을까 봐 그렇게 서둘러 데려간 것일까.

세월은 무심히 흘러 세월호 참사가 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일주일. 관료들의 탐욕과 무능과 부패를 뜻하는 ‘관(官)피아’ 척결의 목소리는 높아만 가는데…. 아직도 16명의 소중한 생명은 캄캄한 바닷속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많이 울었다. 온 세상의 부모들이 다 울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흘린 눈물은 한 줄기 강물을 이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강물은 지금쯤 팽목항 앞바다로 흘러 흘러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오로지 한 분, 대통령만이 그 바다에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았다. 대통령은 왜 울지 않을까.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에 그렇게 인색한 것은 자식을 낳아 보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자식을 키워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자꾸만 늘어갔다.

과한 눈물은 사람을 무르게 보이게 한다. 특히 정치인의 잦은 눈물은 나약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게다가 계산된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라 해서 비난받기 십상이다. 악어가 먹이를 삼킬 때 흘리는 눈물은 먹잇감이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다. 눈물샘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해 주는데 그게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김영삼정부 시절 황산성 환경처 장관은 억울해서 울고, 분해서 울고,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결국 “그리 나약해서 장관직을 수행하겠느냐”는 비판에 시달리다가 임명 된 지 1년도 못 돼 옷을 벗었다. 시도 때도 없이 웃다가 낙마한 이도 있으니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이다. 너무 울어서 탈이요 너무 웃어서 탈이 난 경우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너무 울지 않아서 비판을 받아 왔다. 모두가 우는데 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건 지나치게 차가운 지도자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대통령의 눈물 결핍은 개인적인 불행과 시련을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극복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몇 번인가 눈물을 보인 적도 있다. 지난 3월 독일 드레스덴공대에서 ‘그리운 금강산’ 연주에 눈가를 훔치던 장면을 기억한다. 10년 전에는 탄핵 역풍 속에서 눈물의 TV연설로 총선 판세를 뒤집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아버지(박정희)를 회상하면서 흘린 ‘개인적인 눈물’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대통령께서는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울어 본 적 있느냐?”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눈물의 리더십’이나 ‘엄마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전 ‘눈물로 쓴 편지는 부칠 수가 없어요’라고 노래한 가수(김세화)가 있었다. 눈물은 너무나 빨리 마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르는 속도는 빨라도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는 것이 바로 눈물이다.

눈물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슬픔을 표현하는 침묵의 언어이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김현승)이기도 한 눈물은 때로 백 마디의 말보다 호소력이 강하다. 눈물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이면서 공감과 교감의 적극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통령께서도 드디어 눈물을 보였다. 며칠 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다. 담화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한 마디만 보태자면 ‘눈물은 너무 늦었고 대책은 너무 빨랐지 않나’ 싶다. ‘힐링’이란 게 뭐 별것인가. 같이 아파해 주고, 같이 슬퍼해 주고, 함께 눈물 흘려 주는 것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눈물은 너무 늦었다.

대책으로 제시된 해경 해체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러다가 사고가 날 때마다 정부 부처 하나씩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 잃고 나서 외양간 없애자는 것이냐’는 시중의 비아냥거림이 들린다. 그런 면에서 대책은 너무 빨랐다. 아직 구조도 끝나지 않았는데….

“눈물과 바다를 서로 바꾸어서/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을 통곡하겠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낼 수 있다면”(도종환의 ‘깊은 슬픔’)

그리스 신화에 보면 10여 명의 자녀를 모두 잃고 그 슬픔을 못 이겨 돌이 된 여자(니오베)가 있다. 그녀는 돌이 되어서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돌이 된다 해도 눈물이 마르지 않을 이들이 바로 실종자 가족들일 터.

하지만 담화문의 그 어디에도 참혹한 고통을 겪고 있을 이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 위로가 없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실종자는 외면하고, 유가족은 미행하고, 피의자(유병언 전 회장)는 놓치고. 아, 이 정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