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스며든다] 센터에서 그림 그리고 작물 키우고…예방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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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스며든다] 센터에서 그림 그리고 작물 키우고…예방 첫걸음
(11) 광주·전남 치매 안심마을
65세 이상 거주 비율·치매 환자수 측정
올 9월 기준 광주 21·전남 111곳 지정
매주 예방 교육·노래교실 등 프로그램
순천 판교마을, 인지 강화·주거 개선 병행
광주 남구 효덕동, 고위험군 특화 교육
‘치매파트너’ 조직해 안부 묻고 건강 관리
2025년 09월 22일(월) 21:05
순천시 서면 판교마을 경로당에서 지난 17일 열린 노래교실에서 어르신들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고 있다.
“오늘은 노래 선생님이 오셔서 재미있게 노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동료들도 건강한 모습으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지난 17일 오후 2시, 순천시 서면 판교마을 경로당. 12명의 어르신들이 작은 원탁을 둘러싸고 색연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날의 그림일기 주제는 ‘우리 치매안심마을’이었다.

박조금(여·78) 씨가 또박또박 일기를 써 내려갔다. 22살에 결혼해 이곳에 뿌리를 내린 지 벌써 56년. 그는 “마을이 치매안심마을로 지정된 뒤 훨씬 활기가 생겼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옆자리에서 마을 풍경을 그리던 한 어르신이 갑자기 색연필을 멈췄다. “그때 담양 놀러 갔을 때 추어탕 먹고 막걸리도 마셨잖아.” 옆자리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르신의 눈가가 어느새 젖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감이 보고 싶어. 영감이…”라는 그의 넋두리가 나오자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달래며 함께 눈시울을 붉혔고, 옆에서 지켜보던 치매안심센터 직원도 눈물을 삼키며 어르신을 꼭 안아줬다. 치매 어르신과 일반 어르신이 함께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이 자연스럽다.

판교마을은 2019년 순천시 두 번째 치매안심마을로 지정됐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고 치매 환자 수가 일정 기준을 넘는 마을이 대상이다. 지정 후에는 매주 치매 예방 교육, 노래교실, 일기 쓰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시 남구 치매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어르신이 작물을 키우고 있다.
박조금 씨는 “두 아들이 독립한 뒤 남편과 둘이 지내다 보니 집에만 있으면 외로웠다”며 “요즘은 경로당에서 노래교실도 열리고 직원들이 딸처럼 살갑게 챙겨주니 신이 난다”고 말했다. 비가 오거나 다리가 아파도 꼭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니 더 이상 심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어르신들이 그림일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진행해 작품 전시회까지 열었다. 모여든 이들 가운데는 치매 어르신도,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도 있지만 서로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예전처럼 친구이자 친척,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순천시 치매안심센터 질병관리과 김희연(여·35) 씨는 “어르신들은 서로 누가 치매인지 알지 못한다”며 “치매임을 알게 되면 불필요한 낙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만 알고 세심히 살피고 있다”고 설명했다. 순천시는 생활 환경 개선 사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홀로 사는 어르신 가구에는 전기·누수 점검을 해주고, 화장실에는 안전 손잡이를 설치하는 등 일상 속 위험을 줄였다.

박서윤 순천시치매안심센터 팀장은 “순천시는 치매 치료비와 검사비를 소득과 관계없이 지원하고 있다”며 “치료비는 2022년부터 전액 지원하고, 검사비는 2023년부터 23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조치 덕분에 순천시가 정부 합동평가에서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는 것이 박 팀장의 설명이다. 그는 또 “전화 안내보다 직접 현장을 찾아가 설명하다 보니 어르신들과 신뢰가 쌓였고 프로그램 운영도 원활해졌다”고 덧붙였다.

치매안심마을은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 시행과 함께 전국으로 확산됐다. 올해 9월 기준 광주에는 21곳, 전남에는 111곳이 지정돼 운영되고 있다.

광주시 남구 효덕동도 치매안심마을로 지정돼 있다. 2025년 8월 기준 남구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4만 6022명으로 전체의 22.1%를 차지하며, 이 가운데 치매 환자는 4147명으로 추정된다. 노인 9명 중 1명이 치매 환자인 셈이다.

남구는 치매안심마을을 중심으로 고위험군 대상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경도인지장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작물을 키우고 관찰일기를 쓰는 활동을 진행했다. 콩나물, 새싹보리, 버섯, 인삼 등을 기르며 성장 과정을 기록하게 해 자연스럽게 인지 기능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이다.

안현정 광주남구치매안심센터 치매예방팀장은 “어르신들의 관심사에 맞춰 작물 재배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특히 인삼 재배에 큰 흥미를 보였다”며 “처음에는 ‘귀찮다, 자네가 키워서 주면 안 되겠나’며 망설이던 분들도 결국 성취감을 느끼며 만족해했다”고 전했다.

남구는 또 40여 명의 ‘치매파트너’를 조직해 경도인지장애 어르신과 1대1로 연결하고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혈당을 확인하며 건강 관리까지 돕고 있다. 치매파트너는 관련 교육을 받은 뒤 환자를 지원하는 자원봉사자를 뜻한다.

광주시 남구 ‘치매파트너’가 어르신의 안부 묻기, 혈당 점검 등 건강관리를 돕고 있다. <광주시남구치매안심센터 제공>
효덕동의 한 미용실도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돼 활동 중이다. 17년째 가게를 운영하는 장명숙(여·69)씨는 “매일 주민들을 상대하다 보니 배회하거나 치매가 의심되는 어르신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며 “명절에 잠깐 들르는 가족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작은 변화를 금방 눈치챌 수 있어 필요할 땐 자녀에게 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치매안심마을이 갖는 한계도 분명하다. 실제 광주일보 취재진이 21일 찾은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마을은 ‘치매안심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다른 마을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지난 2017년 ‘전남 1호’ 치매안심마을로 지정됐지만 주민들은 “지정 초기 잠깐 활동이 있었을 뿐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치매 환자 대부분은 주간보호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인근 주민 대상 치매 교육은 별도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부 주민들은 “치매안심마을이 뭐냐”고 되묻기도 했다.

지역사회 치매 안전망의 한 축으로 운영돼야 할 ‘치매안심가맹점’ 역시 유명무실했다. 가맹점 A의 한 직원은 “가게가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된 사실조차 몰랐다”며 “관련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가맹점 B의 주인은 “초기에 공무원들이 나와 안내책자를 나눠주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활동이 없다”며 “대부분 환자들이 복지관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맹점이 할 일도 사실상 없다”고 털어놨다.

지정 기준과 운영 구조가 여전히 모호하고, 실제 운영은 이장 등 마을 구성원의 의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환자가 지역사회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기에는 생활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경로당이나 센터 중심의 프로그램은 활발하지만 교통·주거·문화 공간 등 일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프로그램 또한 인지 훈련이나 예방 교육에 치중돼 있어 환자와 주민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교류할 수 있는 접점은 넓지 않다.

일부 마을에서 자원봉사자와 가맹점 참여를 통해 돌봄의 울타리 를 확장하고 있으나 이를 넘어서는 지속적이고 생활밀착형 지원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다. 치매안심마을이 말 그대로 치매 어르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간판만 걸어놓고 실속은 없는 ‘전시행정’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돌봄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때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정화 전남대 생활복지학과 교수는 “치매안심마을은 단순히 프로그램 운영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치매 환자와 가족, 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필요하다. 치매 환자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치매안심공원’이나 함께 작물을 가꾸는 ‘케어팜(Care Farm)’ 같은 공간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고령화로 치매 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환자와 가족이 일상 속에서 존중받고 어울릴 수 있는 생활 환경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혜원 기자 hey1@·사진=박연수 기자 training@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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