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스며든다] 온 마을이 함께… 치매, ‘연대’에서 답을 찾다
(9) 日 오사카 토요나카시 ‘공생 돌봄’
지역사회 모두가 환자 돌보는 ‘지역공생홈’
토요나카시 사회복지협의회 모델 설계
환자, 집·상점·카페 등 열린 공간에서 일상 영유
주민 함께 어울리는 ‘오렌지 카페’ 25곳 운영
은퇴 노인이 가르치고 환자가 아기 돌보며 선순환
환자에게 일감 주며 ‘꼭 필요한 존재’로 존중
지역사회 모두가 환자 돌보는 ‘지역공생홈’
토요나카시 사회복지협의회 모델 설계
환자, 집·상점·카페 등 열린 공간에서 일상 영유
주민 함께 어울리는 ‘오렌지 카페’ 25곳 운영
은퇴 노인이 가르치고 환자가 아기 돌보며 선순환
환자에게 일감 주며 ‘꼭 필요한 존재’로 존중
![]() 오사카 토요나카시 지역공생홈 자조 모임 대표들과 카츠베 국장(오른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은 이제 노인 돌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본 오사카부 토요나카시에서 확산 중인 ‘지역공생홈’은 치매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나누고, 마을 전체가 일상의 돌봄을 함께 짊어지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치매를 숨기던 과거에서 벗어나, 환자와 가족·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연 것이다.
◇ 치매를 품은 거실, 함께 밥상 차리는 마을 = 지난 6월 23일, 광주일보 취재진이 찾은 토요나카시의 한 주택가. 소박한 거실에는 치매 환자와 배우자, 자녀, 사회복지사, 이웃 주민들이 둥글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손수 만든 반찬을 내놓고, 다른 이는 그림과 바느질을 자랑했다. 집 주인은 어르신들의 이름을 불러 환영했고, 근처 초등학생들이 들러 웃음을 더했다. 이곳에서는 치매는 더 이상 한 가정의 짐이 아니었다.
이 모임은 ‘지역공생홈’이라 불린다. 단순한 환자 가족들의 모임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가 돌봄에 동참하는 구조다.
특히 ‘남성 간병인 모임’은 일본 사회 내에서도 이례적이다. 일본은 돌봄을 여성의 몫으로 여겨왔지만, 현실에서는 부모나 배우자를 돌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과거 속내를 숨기고 홀로 버텼지만, 모임을 통해 같은 처지의 남성들과 경험을 나누면서 “혼자가 아니다”라는 위안을 얻고 있다.
70대 토야 토모타카 씨는 지역공생홈 위원장이자 남성 간병인 모임의 리더다. 그는 “63세에 아내가 조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정년을 앞두고 혼자 모든 걸 해내려 했지만 점점 지쳐갔다. 이 모임에서 같은 처지의 남편들과 속마음을 나누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치매를 숨기던 과거에서 공생으로=이 모델을 설계한 이는 토요나카시 사회복지협의회 카츠베 레이코(勝部麗子) 사무국장이다.
일본 최초의 ‘커뮤니티 소셜 워커’로 불리는 그는 환자를 병원·시설에 가두지 않고 살던 동네에서 일상을 이어가도록 환경을 만들었다. 그의 활동은 NHK 드라마 ‘사일런트 푸어’의 모티브가 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치매는 ‘가문의 수치’였다. 가족들은 데이서비스 차량이 집 앞에 서는 것도 꺼려했고, 환자를 묶어두는 사례까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치매 가족 모임이 처음 생겼을 때도 모임은 은밀히 열렸고,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참여가 늘면서 “치매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과제”라는 인식이 퍼졌다.
카츠베 국장은 “간병이 길어지면 가족은 누구나 지쳐간다. 본인은 계속 돌보고 싶어도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 같은 상황을 겪는 이들과 이야기하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걸 알 때 비로소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오렌지 카페, 일상 속 치매 해법 = 현재 토요나카시에는 25곳의 ‘오렌지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오렌지 카페’는 치매 당사자와 가족,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울리는 공간을 의미한다.
주민의 집, 상점, 심지어 스타벅스까지 열린 공간에서 치매 환자와 가족, 이웃이 함께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환자가 과거 하던 일을 다시 맡기도 한다. 감을 깎아 말리거나 음식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카츠베 국장은 “감을 잘 깎던 어르신이 있었다. 집에서는 칼을 못 잡게 했지만, 오렌지 카페에선 그 일을 하게 했다. 환자를 무능한 존재로만 보지 않고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주민 참여도 자연스럽다. 환자가 길을 잃으면 라인(LINE) 그룹을 통해 즉시 수색에 나서고, 상점 주인은 반복 구매하는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 집까지 배달한다. 작은 연결망이 모여 큰 안전망을 이루는 방식이다. 일본 정부도 오렌지 카페 확산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치매를 넘어 발달장애, 다문화 가정, 등교 거부 청소년까지 포괄한다. 은퇴 노인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치매 환자가 아기를 돌보는 선순환이 마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돌보는 사람이 동시에 돌봄을 받는 ‘공생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주소와 과제=토요나카시의 변화는 곧 한국이 직면할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의 치매 환자는 2024년 기준 100만여 명에 달하고, 2035년에는 17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광주·전남의 치매 유병률은 전국 평균보다 높아, 광주만 해도 65세 이상 인구의 12%가 치매 환자로 추정된다.
정부는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도입해 전국 256개 보건소에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했다. 광주·전남 지역도 각각 5곳의 치매안심센터를 운영하며 조기검진과 돌봄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돌봄 부담은 막대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2023년)에 따르면 치매 가족 돌봄자의 67%가 우울증세를 호소했으며, 평균 돌봄 시간은 하루 13시간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토요나카시 사례처럼 ‘지역 중심 공동체 돌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시설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광주지역 한 대학 교수는 “치매는 병원이 아니라 마을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 환자가 일상 속에서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웃과 연결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토요나카시의 ‘지역공생홈’은 치매 가족의 고립을 풀고, 환자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카츠베 국장은 “치매 환자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사회가 그 가능성을 지켜줄 때 환자는 끝까지 존엄을 지킨다”며 “한국도 일본도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는 지금, 치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라고 말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사진=박연수 기자 training@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일본 오사카부 토요나카시에서 확산 중인 ‘지역공생홈’은 치매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나누고, 마을 전체가 일상의 돌봄을 함께 짊어지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치매를 숨기던 과거에서 벗어나, 환자와 가족·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연 것이다.
누군가는 손수 만든 반찬을 내놓고, 다른 이는 그림과 바느질을 자랑했다. 집 주인은 어르신들의 이름을 불러 환영했고, 근처 초등학생들이 들러 웃음을 더했다. 이곳에서는 치매는 더 이상 한 가정의 짐이 아니었다.
이 모임은 ‘지역공생홈’이라 불린다. 단순한 환자 가족들의 모임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가 돌봄에 동참하는 구조다.
70대 토야 토모타카 씨는 지역공생홈 위원장이자 남성 간병인 모임의 리더다. 그는 “63세에 아내가 조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정년을 앞두고 혼자 모든 걸 해내려 했지만 점점 지쳐갔다. 이 모임에서 같은 처지의 남편들과 속마음을 나누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지역공생홈 내부가 일반 가정집과 같이 꾸며져 있는 모습. |
일본 최초의 ‘커뮤니티 소셜 워커’로 불리는 그는 환자를 병원·시설에 가두지 않고 살던 동네에서 일상을 이어가도록 환경을 만들었다. 그의 활동은 NHK 드라마 ‘사일런트 푸어’의 모티브가 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치매는 ‘가문의 수치’였다. 가족들은 데이서비스 차량이 집 앞에 서는 것도 꺼려했고, 환자를 묶어두는 사례까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치매 가족 모임이 처음 생겼을 때도 모임은 은밀히 열렸고,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참여가 늘면서 “치매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과제”라는 인식이 퍼졌다.
카츠베 국장은 “간병이 길어지면 가족은 누구나 지쳐간다. 본인은 계속 돌보고 싶어도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 같은 상황을 겪는 이들과 이야기하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걸 알 때 비로소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 지역공생홈 내부가 일반 가정집과 같이 꾸며져 있는 모습. |
주민의 집, 상점, 심지어 스타벅스까지 열린 공간에서 치매 환자와 가족, 이웃이 함께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환자가 과거 하던 일을 다시 맡기도 한다. 감을 깎아 말리거나 음식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카츠베 국장은 “감을 잘 깎던 어르신이 있었다. 집에서는 칼을 못 잡게 했지만, 오렌지 카페에선 그 일을 하게 했다. 환자를 무능한 존재로만 보지 않고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주민 참여도 자연스럽다. 환자가 길을 잃으면 라인(LINE) 그룹을 통해 즉시 수색에 나서고, 상점 주인은 반복 구매하는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 집까지 배달한다. 작은 연결망이 모여 큰 안전망을 이루는 방식이다. 일본 정부도 오렌지 카페 확산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치매를 넘어 발달장애, 다문화 가정, 등교 거부 청소년까지 포괄한다. 은퇴 노인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치매 환자가 아기를 돌보는 선순환이 마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돌보는 사람이 동시에 돌봄을 받는 ‘공생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 인지력 상승 놀이, 곶감 말리기 등 치매 환자와 지역 사회가 함께한 ‘오렌지 카페’ 운영 모습이 담긴 앨범. |
정부는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도입해 전국 256개 보건소에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했다. 광주·전남 지역도 각각 5곳의 치매안심센터를 운영하며 조기검진과 돌봄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돌봄 부담은 막대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2023년)에 따르면 치매 가족 돌봄자의 67%가 우울증세를 호소했으며, 평균 돌봄 시간은 하루 13시간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토요나카시 사례처럼 ‘지역 중심 공동체 돌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시설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광주지역 한 대학 교수는 “치매는 병원이 아니라 마을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 환자가 일상 속에서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웃과 연결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토요나카시의 ‘지역공생홈’은 치매 가족의 고립을 풀고, 환자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카츠베 국장은 “치매 환자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사회가 그 가능성을 지켜줄 때 환자는 끝까지 존엄을 지킨다”며 “한국도 일본도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는 지금, 치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라고 말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사진=박연수 기자 training@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