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공동체 잇는 ‘책’… 여섯개 책방 ‘마을’을 이룬 ‘고창서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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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공동체 잇는 ‘책’… 여섯개 책방 ‘마을’을 이룬 ‘고창서점마을’
우리나라 최초 책방 마을 ‘고창 서점마을’
공동 수익·경영 수칙 등 규칙 세워 준수
끝없는 사유와 질문…철학서점 ‘세발자전거’
윤동주 시집·독립출판물 ‘초롱이와 쑥’
생태·그래픽 노블·그림책 등 컨셉 다양
작가의 집, 철학·예술 서점 추가 입주 예정
10월11일 정식 오픈, 이철수·윤선애 참가
2025년 09월 09일(화) 20:55
그래픽 노블과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바가 함께 하는 서점 ‘NO.9’
취재를 가기 전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영국의 작은 마을이 이뤄낸 기적을 담은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2023·씨앗을 뿌리는 사람). 아주 오래 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헤이온와이에 가고 싶다는 마음과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였다. 아직 헤이온와이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기다리던 서점 마을이 ‘드디어’ 오픈했다. 여섯 개의 책방으로 이뤄진 ‘고창 서점 마을’(고창군 대산면 지석남당길 106-5)은 우리나라 최초의 책방 마을이다.

“어느 서점에 먼저 들어갈까?”

고창서점 마을에 들어섰을 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각각의 개성이 담긴 여섯 채의 그림같은 건물에 뚜렷한 지향점을 가진 여섯 개의 서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내년 초까지 작가의 집 한 곳과 두 개의 책방이 더 들어올 예정이다.

마을이 위치한 곳은 영광군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런 곳에 서점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서점마을이 나타난다. 사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사람 왕래 드문 시골 한복판에, 지난 7월 5일 가오픈한 서점마을의 형편을 생각했을 때 모든 책방이 문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라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틀렸다. 모든 서점은 문을 활짝 열고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서점지기들은 마을을 만들며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3년 안에는 각자의 서점과 집을 팔지 않고, 서점이 알려지는 데 최소 3년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기간동안 휴일 없이 문을 연다는 것이다. 주인이 서점을 지키지 못하면 옆짚 서점지기가 일을 대신하기로 했고 이날도 서점 두 곳의 주인장은 없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국내에 책마을이 없는 건 아닌데 대부분 하나의 테마파크, 혹은 단일 주체에 의해 기획된 형태다. 이에 반해 고창 서점 마을은 여섯 개의 독립적인 책방이 마을공동체를 형성한, 명실상부한 ‘서점마을’이다. 서점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 무엇보다 사라졌다고 여겨졌던 공동체 문화가 ‘책’을 중심으로 복원된 느낌이어서 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창서점마을의 여섯 개의 책방을 운영하는 서점지기들.
◇ 철학·그림책 다양한 컨셉 6개의 책방

먼저 발길을 옮긴 곳은 이윤호(63) 촌장과 강선영(63) 부부가 운영하는 철학서점 ‘세발 자전거’다. 1990년대 화제를 모았던 잡지 ‘리뷰’ 등을 만들고 성공회대에서 동양고전 강의를 했던 이씨는 오랫동안 헤이온와이 같은 책방 마을을 소망했다. 경남 하동 등 여러곳을 답사하던 그는 광주의 공부 모임에서 강준석(56), 황경선(54)씨 부부를 만나 오랜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고창에 부모님이 살던 땅이 있다”는 강씨의 말을 들었고, 서점마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오래 살면서 늘 ‘적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어요. 시골에서 작을 마을을 꾸리고 함께 살며 적정한 소비와 그에 따른 적정한 삶의 관계를 고민해보려합니다. 인건비가 나가지 않도록 자기 노동을 통해 책을 팔고 농작물을 키우며 조금은 버티는 삶을 사는 거죠. 예전 잡지 만들던 시절에 느꼈던 끈끈한 공동체적 삶도 기억합니다. 나이 들며 홀로 고립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도 함께 넘고요. 무엇보다 모두가 서점을 통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 자신 있는 것을 하는 즐거움이 큽니다.”

오랫동안 이 촌장과 철학공부를 했던 패션회사 출신 기획자 이준호(61)씨가 합류했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서울·경기와 광주에서 각각 3팀 씩 6팀이 모였다. 서점 마을을 계획한 2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고 전국 서점을 답사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다. 임차료 인건비 부담을 없애기 위해 가정집과 서점을 겸한 자기 건물을 짓고 스스로 노동으로 서점을 운영하기로 했다. 현재 2000평에는 서점이 들어서 있고 2000평에서는 공동으로 농사를 짓는다. 공동구입한 또 다른 2000평은 용도를 고민중이다.

취향과 서점의 성격에 맞게 지은 개별 건물은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책방 컨셉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취향을 드러낸다.

카페를 겸하고 있는 철학서점 ‘세발자전거’






로스터리 카페를 겸하고 있는 ‘세발자전거’는 철학서점이다. 대형서점의 철학코너가 사라지는 세태를 아쉬워하며 여전히 사유하고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서점으로 인문학 강의를 오래 진행한 내공 있는 서점지기의 큐레이션이 돋보인다.

동화 같은 건물 외관이 인상적인 그림책 서점 ‘고릴라’에 들어갔다.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에서 모티브를 얻은 서점은 이지연(51), 김성렬(54)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0세부터 100세까지 함께 보는 ‘모두의 그림책’을 표방하고 있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초록색의 작은 다락방,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 같은 토끼굴 입구 등 흥미로운 공간이 눈에 띈다.

윤동주 시집·독립출판물 서점 ‘초롱이와 쑥’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쑥’ 박숙희씨(53)와 독립출판물과 유시민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초롱’ 김철홍(56)씨 부부가 운영한다. 서점에선 유시민의 책과 윤동주의 시집,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 직접 만든 수공예 굿즈를 판매한다.

그림책 서점 ‘고릴라’
‘맹그로브’는 나무의사 황경선, 도시 농부 강준석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생태 서점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생태 관련 도서들을 중심으로 큐레이션하고 제로웨이스트 물품, 로컬 생태 콘텐츠도 함께 소개한다. 도시농부가 운영하는 서점답게 계절마다 텃밭이 열린다.

“생태 독서모임을 10년 넘게 하면서 읽은 책들을 비롯해 다양한 책들을 가져다 놓았어요. 늘 관심을 가졌던 분야이고 삶의 지향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책에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길’이 있어요. 오시는 분들이 책을 사는 순간 뿌듯해하시는 걸 보면 기분이 좋지요.”(황경선)

그래픽 노블 마니아인 이준호씨가 운영하는 그래픽 노블 서점&바 ‘NO.9’은 흥미로운 공간이다. 프랑스에서 만화를 제9의 예술로 분류한 데서 착안한 이름으로 “자신의 집을 그대로 옮겨”온 ‘취향각’이다. 전 세계 다채로운 그래픽 노블과 그가 수집해온 ‘스타워즈’ 피규어를 비롯해 볼거리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피트 위스티와 샤블리 와인을 잔술로 제공하는 바가 인상적이다.

생태서점 ‘맹그로브’
사고력 교육 교사로 활동하던 박세욱(53)씨가 운영하는 ‘목수의 서점’은 현재 막바지 공사 중이다. 6개월 목수학교를 다닌 경력이 유일한 초보 목수가 혼자서 집을 짓는 터라 다른 서점보다 완공이 늦어졌다. 여행 관련 인문 서적, 라이프 스타일 도서, DIY 물품 등을 판매할 예정이다. 중고책 서점 리북도 자리하고 있다. 성공회대에서 정년한 김동춘, 김창남 교수 등이 기증한 책을 비롯해 다양한 책들이 갖춰져 있으며 판매와 함께 누구나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유서가 형태로 운영된다.

느긋하게 책을 보며 머물다 갈 수 있는 북스테이도 눈길을 끈다. 맹그로브, 목수의 책방, NO.9이 모두 5곳을 운영한다. 숙박비는 성수기·비수기 상관 없이 평일 7만원, 주말·휴일 10만원이다.

현재 작가의 집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며 내년 초까지는과학 교사 출신인 광주 지혜학교 교장이 운영하는 과학서점과 문화연대 출신 서점지기가 꾸리는 예술서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윤동주 시집&독립출판 서점 ‘초롱이와 쑥’
◇ 온기 살아 있는 책으로 묶인 공동체

처음 마을을 조성할 때 거주지를 완전히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걸림돌이 됐고, 현재의 멤버가 확정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협동조합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아왔기에 ‘따로 또 같이’ 모토 아래 몇가지 원칙을 정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무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분간 서점 운영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하기에 지역 특산물을 리뉴얼해 판매하는 마을 기업을 설립해 발사믹 식초 등을 판매하고 있다. 또 서점마을 구독 프로그램(분기 6만원)을 운영, 서점지기들이 선정한 ‘이달의 책’ 한권과 원두 200그램, 발사믹 식초, 고창군 제철 농산물 등을 보내준다.

임시로 문을 열고 2개월이 지난 지금, 조금씩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다녀갔고 모두 응원의 말을 전한다.

“서점을 찾는 이들과 맺어지는 방식이 진한 것 같아요. 머물고 가는 시간도 길고 대화도 계속해서 이어지죠. 두 시간 머물다 간 군인 손님이 기억에 남네요.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데 고창에 서점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택시타고 찾아와 27만원 어치 책을 사가더군요. 그가 떠나며 한 말이 “제발 문닫지 말라”였어요.”(이윤호)

고창서점마을은 오는 10월11일 정식으로 문을 연다. 이날 행사에는 판화가 이철수, 가수 윤선애, 여균동 감독 등이 함께 할 예정이다. 머릿 속에서 꿈꾸던 상상이 현실에서 구현된 ‘고창서점마을’은 책과 사람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공간임에 틀림없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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