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건축기행] 인천 답동성당
격동의 역사를 품다 생동의 문화를 담다
1897년 건축 후 1937년 현재 모습…아치·돔 로마네스크 양식
일제·한국전쟁·민주화운동까지…시민과 함께 견뎌온 ‘산 증인’
옛 주교관 건물, 역사관 되고 신포국제시장 연계 관광자원화도
1897년 건축 후 1937년 현재 모습…아치·돔 로마네스크 양식
일제·한국전쟁·민주화운동까지…시민과 함께 견뎌온 ‘산 증인’
옛 주교관 건물, 역사관 되고 신포국제시장 연계 관광자원화도
![]() 인천 중구는 답동성당을 가리고 있던 가톨릭회관을 허물고 휴게시설과 조명 등을 설치해 시민들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
인천 개항장 인근에는 유서 깊은 성당이 있다. 1897년 인천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가톨릭 성당 ‘답동성당’이다.
인천 중구 우현로 50번길에 위치한 언덕을 오르면 고풍스런 분위기의 건축물이 보인다. 넓은 광장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사로잡는다.
아름다운 외관의 답동성당은 개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관문 도시 인천의 근현대 역사를 품고 있다.
1981년 국가 사적 제287호 지정된 답동성당은 천주교 신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명소다.
◇개항과 천주교 역사
인천은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1800년대 초반 선교사들은 인천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와 한반도에 천주교를 전파했다. 선교 자금과 물품 등도 모두 인천을 거쳐 국내 각지로 전해졌다.
교회사 관점에선 1886년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생겼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 인천교구가 발행한 ‘인천교구사’를 보면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 빌렘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해 포교활동을 벌였다. 지금의 땅을 싼값에 기증받은 빌렘 신부는 성당 건축을 계획했다.
이후 제2대 주임 신부의 주도로 건립 자금을 마련한 뒤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립이 시작됐지만, 1894년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1897년 7월이 돼서야 답동성당이 지어졌다. 당시 성당은 첨탑이 뾰족한 고딕 양식으로 건립됐다.
이후 신도들이 증가하면서 증축 과정을 거쳤다. 성당 외곽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1937년 공사가 마무리됐다. 아치와 둥근 돔을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서울 혜화동 성당의 초대 신부였던 시잘레 신부가 설계한 것이다.
답동성당 전면을 바라보면 큰 종탑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좌우로 작은 종탑이 위치해 있다. 이 종탑은 답동성당의 웅장함을 더한다.
◇격동의 세월, 시민들에게 문을 연 성당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성직자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고난의 시기를 인천시민과 함께 견뎌냈다.
인천교구사에는 당시 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 1945년 광복 직전 일제는 답동성당에 있는 종을 헌납할 것을 강요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임종국 주임 신부는 축성한 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일제의 강압이 이어지자 임 신부는 작은 종 2개를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데 사용하겠다고 제안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 종은 해방 이후 성당에 무사히 되돌아왔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천상륙작전 때는 포탄에 답동성당 지붕이 부서지기도 했다.
답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다. 인천교구 성직자들이 직접 민주화 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성당이 집회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65년엔 인천교구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1970년대 후반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함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 등을 진행했다. 이른바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이후 벌어진 노동운동에도 연대하며 힘을 보탰다.
당시 종교시설은 사법당국의 간섭이 비교적 덜했다. 답동성당은 유신헌법 반대운동, 인천5·3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등 시민과 노동·사회단체들의 집회 장소가 됐다.
1977년 8월에는 유신 철폐를 위한 기도회가 답동성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80여명의 사제와 2천여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다. 유신 철폐와 언론 자유를 주장한 김병상 신부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1980~1990년대 답동성당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의 피신 장소로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종교시설을 넘어 시민들의 문화시설로 탈바꿈
130년 가까이 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답동성당은 종교시설을 넘어 역사와 문화를 담은 시민들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답동성당에서 나와 바로 옆으로 이동하면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이 있다. 역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형구돌’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옛 주교관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지난 2021년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역사관은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인천의 근현대 역사를 한 곳에 정리해둔 박물관의 성격이 짙다. 개항 전후로 시작된 천주교 도입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몰려든 피난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향한 시민들의 역사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3월부터는 1950년대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 특별기획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획전은 내년 3월까지 진행된다.
역사관에서 나오면 넓은 광장과 신포국제시장의 모습이 한눈에 담긴다.
인천 중구는 지난 2021년부터 이곳 일대를 정비하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을 진행했다. 답동성당 앞에 있던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상부 광장에 휴게 공간, 야간조명시설, 청동 조형물 등을 설치했다. 지하에는 공영주차장을 마련하고, 신포국제시장과 연결된 통로를 조성해 시민들의 편의도 높였다.
인천교구는 이달부터 신도들을 대상으로 답동성당, 신포동 일대 개항장과 조계지 일대를 돌아보는 순례길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 관점의 전문 해설을 받을 수 있다.
오는 2027년 국내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에 레오 14세 교황의 한국 방문이 예정돼 있다. 이 행사로 해외 천주교 신도들의 국내 방문이 늘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교구도 이 일정에 맞춰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외국인을 위한 다국어 프로그램 해설사를 인천교회사연구소에서 양성할 계획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장을 맡고 있는 장동훈 신부는 “답동성당은 격동기 인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묵묵히 바라본 증인과 같은 곳”이라며 “이곳은 시민들에게 멀리 있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하고, 거부감 없이 우리 지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면서 편하게 찾는 곳이 되고 있다”고 했다.
/경인일보=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사진=경인일보 백효은 기자·김용국 기자yong@
인천 중구 우현로 50번길에 위치한 언덕을 오르면 고풍스런 분위기의 건축물이 보인다. 넓은 광장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사로잡는다.
아름다운 외관의 답동성당은 개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관문 도시 인천의 근현대 역사를 품고 있다.
![]() 답동성당 내부에 설치된 화려한 색감의 스테인드글라스. |
인천은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1800년대 초반 선교사들은 인천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와 한반도에 천주교를 전파했다. 선교 자금과 물품 등도 모두 인천을 거쳐 국내 각지로 전해졌다.
교회사 관점에선 1886년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생겼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이후 제2대 주임 신부의 주도로 건립 자금을 마련한 뒤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립이 시작됐지만, 1894년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1897년 7월이 돼서야 답동성당이 지어졌다. 당시 성당은 첨탑이 뾰족한 고딕 양식으로 건립됐다.
이후 신도들이 증가하면서 증축 과정을 거쳤다. 성당 외곽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1937년 공사가 마무리됐다. 아치와 둥근 돔을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서울 혜화동 성당의 초대 신부였던 시잘레 신부가 설계한 것이다.
답동성당 전면을 바라보면 큰 종탑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좌우로 작은 종탑이 위치해 있다. 이 종탑은 답동성당의 웅장함을 더한다.
![]() 인천 중구 답동성당 내부 모습.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성직자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고난의 시기를 인천시민과 함께 견뎌냈다.
인천교구사에는 당시 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 1945년 광복 직전 일제는 답동성당에 있는 종을 헌납할 것을 강요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임종국 주임 신부는 축성한 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일제의 강압이 이어지자 임 신부는 작은 종 2개를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데 사용하겠다고 제안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 종은 해방 이후 성당에 무사히 되돌아왔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천상륙작전 때는 포탄에 답동성당 지붕이 부서지기도 했다.
답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다. 인천교구 성직자들이 직접 민주화 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성당이 집회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65년엔 인천교구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1970년대 후반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함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 등을 진행했다. 이른바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이후 벌어진 노동운동에도 연대하며 힘을 보탰다.
당시 종교시설은 사법당국의 간섭이 비교적 덜했다. 답동성당은 유신헌법 반대운동, 인천5·3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등 시민과 노동·사회단체들의 집회 장소가 됐다.
1977년 8월에는 유신 철폐를 위한 기도회가 답동성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80여명의 사제와 2천여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다. 유신 철폐와 언론 자유를 주장한 김병상 신부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1980~1990년대 답동성당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의 피신 장소로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 인천 중구 답동성당 내부 모습. |
130년 가까이 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답동성당은 종교시설을 넘어 역사와 문화를 담은 시민들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답동성당에서 나와 바로 옆으로 이동하면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이 있다. 역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형구돌’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옛 주교관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지난 2021년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역사관은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인천의 근현대 역사를 한 곳에 정리해둔 박물관의 성격이 짙다. 개항 전후로 시작된 천주교 도입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몰려든 피난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향한 시민들의 역사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3월부터는 1950년대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 특별기획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획전은 내년 3월까지 진행된다.
역사관에서 나오면 넓은 광장과 신포국제시장의 모습이 한눈에 담긴다.
인천 중구는 지난 2021년부터 이곳 일대를 정비하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을 진행했다. 답동성당 앞에 있던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상부 광장에 휴게 공간, 야간조명시설, 청동 조형물 등을 설치했다. 지하에는 공영주차장을 마련하고, 신포국제시장과 연결된 통로를 조성해 시민들의 편의도 높였다.
인천교구는 이달부터 신도들을 대상으로 답동성당, 신포동 일대 개항장과 조계지 일대를 돌아보는 순례길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 관점의 전문 해설을 받을 수 있다.
오는 2027년 국내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에 레오 14세 교황의 한국 방문이 예정돼 있다. 이 행사로 해외 천주교 신도들의 국내 방문이 늘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교구도 이 일정에 맞춰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외국인을 위한 다국어 프로그램 해설사를 인천교회사연구소에서 양성할 계획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장을 맡고 있는 장동훈 신부는 “답동성당은 격동기 인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묵묵히 바라본 증인과 같은 곳”이라며 “이곳은 시민들에게 멀리 있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하고, 거부감 없이 우리 지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면서 편하게 찾는 곳이 되고 있다”고 했다.
/경인일보=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사진=경인일보 백효은 기자·김용국 기자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