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아가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KIKI'
공연 리뷰 - ACC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ACC 올해 첫 ‘퍼니’ 작품…평단·관객들에 꾸준한 사랑
수많은 경계성 인격장애 ‘키키’들에 ‘희망 메시지’ 전해
ACC 올해 첫 ‘퍼니’ 작품…평단·관객들에 꾸준한 사랑
수많은 경계성 인격장애 ‘키키’들에 ‘희망 메시지’ 전해
![]() ACC 예술극장 극장2에서 12일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가 펼쳐졌다. <ACC 제공> |
“인정한다, 키키. 너의 고통을, 너의 병을 인정한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삶,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키키’가 관객 앞에 섰다.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은 주인공 키키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직장에서 일주일을 채 견디지 못하고, 힘든 일을 마주치면 도망쳐버리는 구제불능의 그가 자신의 병을 깨닫고, 인정하고, 맞닥뜨리는 과정에 대해서.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가 지난 11~12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예술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작품은 ‘공연제작소 작작’이 제작했으며, 지난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올해의 신작’에 선정돼 초연한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올해 첫 공연이 광주에서 열리면서 ‘뮤덕(뮤지컬 덕후)’들의 이목을 끌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키키예요. 황금 같은 이 시간에 여길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공연의 서두는 관객들을 키키의 토크콘서트로 초대한다.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5명의 ‘호스트’들과 달리 체크남방에 청바지, 스니커즈로 평범한 차림새의 키키는 마치 가까운 친구 혹은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과도한 음주와 난폭운전, 반복되는 자해와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키키는 결국 경계성 인격 장애 진단을 받는다. “정서적 피부가 벗겨진 것과 같아요. 아주 사소한 일도 화염방사기로 불을 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지죠.” 그래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키키는 ‘변증법적 치료’를 시작하기로 한다.
치료를 시작한 이후로도 키키의 내면에는 언제나 ‘화염방사기’가 어른거린다. 겨우 취업한 직장에서는 실수를 연발하고, 상사의 평범한 한마디가 어마무시한 욕설로 들린다. 자신을 괴롭게 하던 애인과 드디어 헤어지고도 다시 붙잡고, 자해를 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내 안의 멋진 녀석 살아있었구나”하며 신나하다가도 “나이만 처먹고 미성숙한 인간”하고 자학하기도 한다.
극은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다. 여타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세트도,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넘버(노래)도 없다. 변증법적 치료에 맞춰 ‘시작-안전-트라우마 마주하기-아군과의 화해’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가며 고통을 견디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내면을 비출 뿐이다.
그러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5명의 호스트들은 키키를 도와 의사, 전 애인, 엄마, 직장 동료, 심지어 고양이와 계산대 등을 연기한다.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고, 특정 역할을 서로 맡겠다고 경쟁하는 모습은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환기한다.
혼란스러운 키키의 내면을 따라 진행되는 다채로운 넘버도 극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다. 키키가 패닉에 빠질 때는 하드록이, 병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와 대립할 때는 랩 배틀이 펼쳐진다. 키키가 “구세주가 필요해”라고 호소할 때는 가스펠도 등장한다. 댕~ 하고 울리는 ‘싱잉볼(명상에 쓰이는 주발)’ 소리는 폭발해버린 키키를 진정시킴과 동시에 장면을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상담사 에단과의 약속을 지켜가며 키키는 자해충동으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법을 하나씩 배워간다.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얼음을 손에 쥐어 안전한 고통으로 대신하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발버둥치던 키키를 위로한 것은 결국 주위로부터 자신의 고통을, 병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과 자신의 가장 큰 아군인 엄마,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나서야 행복을,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다.
극을 마치며 키키는 수많은 ‘키키들’에게 말한다. “병은 완치되지 않았고, 여전히 불쑥불쑥 등장하는 화염방사기와 싸우고 있지만,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아니, 계속해서 연습 중이라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우리 함께 나아가자고.”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벼랑 끝에 선 듯한 삶,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키키’가 관객 앞에 섰다.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은 주인공 키키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직장에서 일주일을 채 견디지 못하고, 힘든 일을 마주치면 도망쳐버리는 구제불능의 그가 자신의 병을 깨닫고, 인정하고, 맞닥뜨리는 과정에 대해서.
![]() ACC 예술극장 극장2에서 12일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가 펼쳐졌다. <ACC 제공> |
“안녕하세요. 저는 키키예요. 황금 같은 이 시간에 여길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공연의 서두는 관객들을 키키의 토크콘서트로 초대한다.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5명의 ‘호스트’들과 달리 체크남방에 청바지, 스니커즈로 평범한 차림새의 키키는 마치 가까운 친구 혹은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치료를 시작한 이후로도 키키의 내면에는 언제나 ‘화염방사기’가 어른거린다. 겨우 취업한 직장에서는 실수를 연발하고, 상사의 평범한 한마디가 어마무시한 욕설로 들린다. 자신을 괴롭게 하던 애인과 드디어 헤어지고도 다시 붙잡고, 자해를 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내 안의 멋진 녀석 살아있었구나”하며 신나하다가도 “나이만 처먹고 미성숙한 인간”하고 자학하기도 한다.
극은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다. 여타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세트도,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넘버(노래)도 없다. 변증법적 치료에 맞춰 ‘시작-안전-트라우마 마주하기-아군과의 화해’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가며 고통을 견디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내면을 비출 뿐이다.
그러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5명의 호스트들은 키키를 도와 의사, 전 애인, 엄마, 직장 동료, 심지어 고양이와 계산대 등을 연기한다.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고, 특정 역할을 서로 맡겠다고 경쟁하는 모습은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환기한다.
![]() ACC 예술극장 극장2에서 12일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가 펼쳐졌다. <ACC 제공> |
“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상담사 에단과의 약속을 지켜가며 키키는 자해충동으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법을 하나씩 배워간다.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얼음을 손에 쥐어 안전한 고통으로 대신하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발버둥치던 키키를 위로한 것은 결국 주위로부터 자신의 고통을, 병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과 자신의 가장 큰 아군인 엄마,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나서야 행복을,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다.
극을 마치며 키키는 수많은 ‘키키들’에게 말한다. “병은 완치되지 않았고, 여전히 불쑥불쑥 등장하는 화염방사기와 싸우고 있지만,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아니, 계속해서 연습 중이라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우리 함께 나아가자고.”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