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山을 훔쳐보고 詩를 건지다’ 구순 문인화가의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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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山을 훔쳐보고 詩를 건지다’ 구순 문인화가의 예술혼
남도문인화 맥 이어온 거목
91세 금봉 박행보 화백
한시·그림·서예 담은 시화집 발간…의재 허백련 사사
자신만의 필법으로 ‘금봉산수’라는 독특한 경지 개척
“예술에 대한 선한 욕심,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힘”
2025년 03월 17일(월) 20:10
봄 경치를 그리다 물이 졸졸 흐르는 골짜기와 산봉우리 봄 경치를 붓 휘둘러 그렸다 안개 속 초록의 생생한 기운 복사꽃 피었으니 어찌 선경이 아니랴
예로부터 선비들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 윤두서나 김정희 등은 시서화 삼절(三絶)에 모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이들은 예술에 대한 숭고한 열정,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최근 구순이 넘은 어느 화백을 만나러 가는 길에 조선의 문인화가가 떠올랐다. 물론 동시대가 아니기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평생 화업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필법을 구현, 예술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귀감이 된다.

금봉 박행보 화백이 최근 시화집 ‘江山을 훔쳐보고 詩를 건지다’를 펴냈다. 작품 작업 중인 박 화백.
올해 우리 나이로 91세인 금봉(金峰) 박행보 화백. 그에게는 ‘남도문인화의 맥을 이어온 거목’이라는 수사가 따른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필법으로 ‘금봉산수’라는 독특한 산수의 경지를 이룩했다.

의재 허백련을 사사한 남도화맥의 큰 산인 금봉이 최근 시화집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江山(강산)을 훔쳐보고 詩(시)를 건지다’라는 제목의 시화집은 그의 예술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다. 산수를 보며 절로 심중에서 발아하는 시를 조심스럽게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세 때 문인화에 처음 입문해 올해로 65년간 화업을 이어왔습니다. 오래 전에 그림을 그리면서 글(시)을 써야겠다는 꿈이 있었죠. 그래 언젠가 마음먹고 한 번 썼는데 시를 쓰시는 분이 그냥 웃었습니다. 고시(古詩)처럼 지은 시였어요. 그 이후로는 시작을 아예 포기했어요.”

이번 시화집을 펴내게 된 계기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평생 글씨와 그림을 해왔지만 노 화백의 내면에는 시에 대한 열망, 시를 쓰고자 하는 두근거림이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작업실이 딸린 방에서 옥편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계림동 광고 인근에 있는 구옥은 족히 60~70년은 돼 보였다. 자연스레 부려둔 정원에서는 봄의 생기가 돌았다.

91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박 화백은 정정했다. 다소 어깨가 굽고, 귀가 조금 들리지 않은 것 외에는 정정했다.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이에게서 느껴지는 고고함, 의연함 같은 분위기가 배어나왔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노송의 이미지가 느껴졌다.

이번 시화집에는 16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는 7언 율시, 5언 율시 등 한문으로 지은 작품과 한글로 쓴 시 등이 포함돼 있다. 한글로 시를 쓸 수 있는 화가들은 많지만 한문으로 율격을 맞춰 시를 쓴다는 것은 어지간한 공부와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할 터였다.

“꽤 오랜 세월 시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70대 후반 무렵에 지인이 사군자를 배우러 왔습니다. 그 분이 자신도 시를 지을 줄 안다는 거예요. 그래 “나도 한시를 짓고 싶은데 자료가 없다”고 하니 백년옥편과 운자표기를 줬습니다.”

자신이 쓴 시를 매개로 그것도 한시를 토대로 시화집을 낸 경우는 거의 없다. 금봉은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것을 한 번 시도해보고 싶었다”며 “예를 들어 ‘국화’라면 국화도 그리고, 그것으로 한시도 써볼 계획이었다”고 했다.

79세부터 본격적으로 한시를 썼다. 1차로 지난 2019년 책을 냈는데 “지금 보면 한자가 엉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자신이 설정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시는 글자 수가 오언과 칠언으로 나뉘는데다 사구(四句)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운자(韻字)까지 맞추어야 하니 어지간한 공부와 노력, 재능이 없이는 한시 창작은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금봉산수’라는 하나의 경지를 이룬 박 화백은 또 하나의 산을 넘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릴 때는 무난하여 다행하였지만/ 어눌해서 세상을 박정하게 느꼈을 뿐/ 뜻밖에 하늘이 무너지는 변을 당하니/ 청운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몸에 배인 버릇은 산수를 그리고/ 매란국죽 정신도/ 여망은 걸작에 힘써 노력하지만/ 어찌 흐르는 세월 붙잡으리오”(行路難, ‘행로난·어려운 세상살이’ 전문)

‘行路難’(행로난·어려운 세상살이) 시는 박 화백의 지나온 길을 보여준다. 어느 인생이든 평탄한 길은 없겠지만, 그는 문인화 선택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린 것은 잘 한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작품에 빠져 있을 때는 자고 나면 그림만 생각했어요. 한마디로 나쁜 생각, 권모술수를 부린다든가 할 틈이 없었지요. 요즘 들어 하나님께 자주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업실에 놓인 화구들이 구순 노(老) 화가의 열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초대문인화이사장을 초대, 2대 역임했다. 만장일치로 추대된 것은 신망이 두텁고 영향역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제자는 광주 뿐 아니라 부산 등 전국에 있는데 시화집 발간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아는 지인, 제자들을 초청해 식사하고 조촐한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는 비결은 규칙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예술에 대한 선한 욕심”은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말에서 구순이 넘은 노 화백의 열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아내가 세상을 떠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지만 막내딸이 아래채에 머물며 식사 등을 챙겨준다”며 “하루에 30분씩 광주고 운동장이나 푸른길을 걸으며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를 짓는다는 것이 뇌를 많이 쓰는 일이니 치매가 올 일은 없다”며 “이 나이에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안분지족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박 화백이 금봉(金峰)이라는 호를 갖게 된 연유가 궁금했다. 의재 문하생으로 입문한 지 3년쯤 되던 해, 전남대 농대학장을 지낸 정상호 교수와 함께 의재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의재 선생님이 “정학장은 진도 지산면 지력산(智力山) 아래서 태어났으니 지봉(智峰)이고, 자네는 금골산(金骨山) 아래에서 태어났으니 금봉(金峰)이라 해라”며 아호를 내려주셨다”고 밝혔다.

한편 문순태 소설가는 “은유나 적절한 시어 선택을 비롯해서 작품의 완성도 문제는 차지하고 일단은 시적 영감과 문인화의 회화적 세계가 상통하여 높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고 평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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