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유익한 인터뷰] 삶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 정지아 작가
32년 만의 장편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에서 한국문학의 장르로
“긍게 사람이제, 오죽하면 글겄냐”
작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시대의 온기
‘빨치산의 딸’에서 한국문학의 장르로
“긍게 사람이제, 오죽하면 글겄냐”
작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시대의 온기
![]() 정지아 작가 |
‘이토록 유익한 인터뷰’는 알아두면 유익한 지식과 함께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전하고자 합니다. 사회, 문학, 철학, 경제, 과학 등 각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 그리고 만나고 싶은 셀럽들의 인터뷰를 통해 여러분의 지식창고를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참 오랜만이다. 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웃고 웃느라, 결국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어 버렸다. 정지아 작가가 무려 32년 만에 ‘각 잡고’ 발표한 소설답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이면서 혁명전사였던 아버지가 노동절 새벽에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생의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된다. 선 굵은 역사적 서사에 톡 쏘는 청량음료 같은 가벼움이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념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국엔 나약하고 또 강인한 인생 이야기가 보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74년이 지났다. 수 천 년을 한 민족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두부모 자르듯 무심하게 그어버린 38선을 사이로 남과 북으로 갈라섰다. 스스로의 힘으로 광복을 얻지 못한 대가는 동족 간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서로를 미워한 채 적이 됐다. 한반도를 갈라버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싸움이었다.
각자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어느 순간 적이 된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민주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이나 빨치산 같은 단어는 배척과 갈등의 금기어였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 법칙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사물의 현상과 전개가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프랑스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한 빨치산을 적대시하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 지리산 옆에 있는 산 정도로 짐작하는 세대도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첫 장편소설 이후 3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정지아 작가도 달라졌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식을 특유의 위트와 발랄함으로 시종일관 웃음과 감동을 전한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많은 에피소드는 서글프지만 웃기고, 울분이 솟다가도 “긍게 사람이제.” 한마디로 상황 종료되는 것이 시트콤을 연상시킨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가 무심한 듯 다정한 작가를 닮았다.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며 장르가 된 정지아 작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강연이 늘었다는 것만 다를 뿐 전과 다름없이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작은 텃밭도 가꾸고요. 고양이 네 마리와 강아지와 엄마를 먹여 살리면서요. 상추는 무성하게 자라서 집에 오는 지인들 모두 챙겨주죠. 조금 있으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호박잎 쌈도 맘껏 먹을 수 있겠네요. 자연은 잠시도 똑같을 때가 없습니다. 바람에 따라 햇빛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죠. 우리집 고양이들과 창가에 앉아 순간순간 달라지는 자연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엄마가 조금씩 늙어가는 일은 가장 큰 서글픔이고요. 좋은 것만 볼 수는 없겠죠. 슬픔도 기쁨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Q.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어서 기분이 남다르겠어요?
32년 전, <빨치산의 딸>은 제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실록이거든요. 그분들이 왜 해방 정국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싸웠는가 이 기록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옳든 그르든 공이든 과든 역사는 다 기록되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까지는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요. 빨치산 부모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빨치산 얘기를 다시 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신념을 가졌던 사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신념이 구체적인 삶의 관계 속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은 아버지와 평생 불화했던 딸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3일 동안 손님을 맞으면서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 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자식들이 그러하듯이요.
Q. 소설 속 부모님은 전직 빨치산, 실제로는 어떤 분들이셨나요?
모든 소설은 작가 입장에서 재해석된 에피소드들이라서 부모님 얘기도 70프로 정도 사실입니다.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허구인데 소설 속 화자의 어린 시절 추억은 실제에 가깝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일찌감치 화해한 반면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가진 채 성장하면 화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화자처럼 저도 처음에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죠.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감옥에 가셔서 중3 때 나오셨어요.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고 나서 일상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철이 들어서 처음으로 보게 됐는데 그냥 너무 좋은 사람인 거예요. 이를테면 눈 내리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온 동네 눈 다 쓸고, 남의 집 일을 내 일처럼 하는 사람 있잖아요. 어머니는 그래도 딸이 우선이라서 맛있는 음식도 따로 챙겨두는 분이었는데 아버지는 손님 오면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데올로기가 뭔지 몰랐지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라면 대단히 나쁜 죄는 아닐 것이다 이러면서 인간적으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가서는 한국 현대사 책을 많이 읽었는데 당시 역사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아버지와의 사이는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Q. “아버지가 죽었다.” 소설 첫 문장이 주는 강렬함이 큰데요?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한 게 사실은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나서 며칠 동안 생존해 계셨거든요. 근데 의식이 없는 상태죠. 그때 아버지 옆에서 느낀 게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첫 시작을 아버지가 다쳤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시작해 보기도 하고, 시속 180~200킬로미터 속도로 안갯속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장면에서도 시작해 보고, 의식 없는 아버지를 처음 대면한 순간도 생각해 봤는데 너무 무거운 거예요. 이번 소설은 좀 가볍고 경쾌하게 쓰려고 작정을 했었거든요. 그래야 요즘 친구들도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까 고민하다가 문득 “아버지가 죽었다”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일부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도 아니고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한 건 더 냉정하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렇게 썼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한 생명의 마지막이 안 무거울 수가 없잖아요. 아버지가 죽었다고 썼는데 이것도 가벼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이걸 가볍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다가 좀 우스꽝스럽게 죽는 상황을 추가하면 죽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뒷 문장까지 완성했습니다.
Q. 마지막도 자유로운 혁명가 아버지다운 엔딩이었던 것 같아요?
엔딩은 소설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이데올로기든 무엇이든 간에 좌든 우든 간에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고 하는 것이잖아요. 그게 산속에서 고결하게 나의 동지들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고요. 또 하나는 어쨌든 사회주의는 진작에 끝났지만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에 대한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잖아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후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 기왕이면 가장 소외된 사람, 미성년자이고 여성이고 그리고 심지어 다문화 가정의 아이를 통해서 공평한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이어가면 좋겠다는 의미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근데 제 아버지는 묶인 데가 없었던 분이라 사실은 이념적으로 해방될 필요가 없었어요. 다만 이념이라는 것도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모든 사람의 죽음이 욕망과 고통이 내재된 생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해방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남도의 구성진 사투리가 소설 인기에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전에 썼던 소설들에도 전라도 사투리가 등장하는 소설들이 몇 편 있었어요. 저희 할머니가 1900년생이시거든요. 유관순 누나가 1902년생이세요. 근데 유관순 누나는 1919년에 돌아가셨지만 저희 할머니는 1991년에 돌아가셨어요. 제 고향이 반내골이라고 되게 작은 동네인데 13살에 시집오셔서 그 동네에서만 거의 80년 가까이를 사셔서 구례 사투리를 정확하게 쓰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로 하는 건 까먹었지만 할머니의 사투리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어요. 또 요즘에는 제가 살고 있는 구례에서 친해진 도서관 사서분이 계신데 사투리를 되게 맛깔스럽게 잘해요. 그래서 제가 수시로 전화해서 구례 사투리 번역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Q.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MZ세대들에게 왜 인기가 많을까요?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여전히 신기합니다. 처음에 제 책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은 이른바 386세대들이었죠. 대부분 직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된 분들인데 책을 읽으면서 아마도 자신들이 걸어왔던 청춘의 시절을 추억하면서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근데 MZ세대들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어요. 저는 젊은 세대는 진지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옹졸한 편견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중요한 현대사이지만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냥 옛 역사였던 거예요. 잘 모르니까 오히려 편견도 없었던 겁니다.
386세대 중에는 책을 사기는 했는데 딱 펼치는 순간 빨치산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냥 덮어뒀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반면에 젊은 세대 중에는 단 한 명도 그런 분이 없었어요. 빨치산이 지리산 옆에 있는 산인 줄 알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빨치산이 프랑스어에서 왔다고 하면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제가 더 놀란 이유는 젊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빨치산이나 빨갱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봐야겠다는 거예요. 열린 사고를 가진 세대라는 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맙고 부러웠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열린 사고가 가능했던 것은 386세대가 이뤄낸 토대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386세대들이 좋아해요.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우리가 뭐라도 하나 남겼구나.
Q. 32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달라진 점이 있나요?
<빨치산의 딸>은 제가 소설이 아니고 실록이라고 수백 번을 강조해도 자꾸만 소설이라고 그러시고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제가 소설이라고 백 번을 얘기해도 자꾸 다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사가 참 마음대로 안 돼요(웃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쨌건 둥글둥글해지면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주 단순하게는 제가 20~30대 때는 불의에 눈 감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했고,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나이 들어 보니까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제가 살을 빼려고 10년째 고민하고 있는데 1킬로그램 빼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머리로는 다 생각해도 그것을 삶에서 구체화시키는 게 쉽지 않구나, 이런 거를 나이 들면서 깨닫고 있습니다.
또 이데올로기라는 상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이해하는 순간 다 풀어집니다. 부모님이 지금 세상과 맞지 않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지 꿈꿨던 세상은 아름다웠다는 걸 이해하고 나니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모두 사라졌어요. 저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부모님이 정말 큰 사랑을 주셔서 이겨낼 힘도 있는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고통이 가장 크고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고통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내가 남달리 그렇게 고통스럽게 산 것도 아니겠다 어디 가서 고생했다는 얘기는 하지도 말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이해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Q. 구례에 다시 돌아와서 살아보니 어떤가요?
2011년에 구례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가 처음 구례에 내려온 건 어머니가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았어요. 제가 어머니의 기대에 늘 부응하지 못한 딸이었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가 곁을 지키는 일이구나 싶어서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가 정말 많이 아프셔서 일 년 정도 예상하고 구례에 내려왔는데 어머니가 점점 더 건강해지셨어요. 2년째 되니까 아픈 데가 하나도 없고, 3년째 되니까 검은 머리가 나고, 4년째 되니까 눈까지 밝아지셨어요.(웃음)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구례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구례로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 천지입니다. 섬진강변의 벚꽃길, 반야봉의 낙조, 노고단의 운해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벚꽃은 정 없어 싫고 산수유는 속없어 싫다는 동네 할매, 필요 없다고 해도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기어이 가져다주는 식당 주인, 심지어는 먹지도 못할 억센 나물을 삶으면 부드럽다고 뻥쳐서 파는 장터 할매까지, 이곳엔 사람 냄새 넘치는 이웃들이 가득합니다. 오죽하면 할매가 뻥을 치겠는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급하면 뻥도 치고 호통도 치는 것이 사람이죠.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 멘트였는데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진작 아버지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작가님에게 구례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원래 구례를 되게 싫어했습니다. 극장 하나 없고 문화생활도 할 수 없고 서울 한 번 가려면 7시간에서 8시간이 걸리고 이런 촌구석을 사랑하는 아이는 아마 거의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온 동네 사람들이 제가 빨치산의 딸인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싫어서 어머니를 졸라 서울로 전학도 갔었죠.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는 시골마을의 공동체 문화도 정말 싫어했었는데 구례에 다시 돌아와서 살다 보니까 젊은 시절의 느낌과는 또 다르더라고요.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도 제 삶의 조건이고, 그걸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거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기 모습을 꾸며내서 얘기를 하는 순간 진짜 자기는 묻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런 말조차 털어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형식적이겠어요. 서울에서는 친구들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많았는데 고향 마을에서는 사람이 왜곡되지는 않아요. 이런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이 저한테 여러 가지를 많이 깨닫게 해줬어요. 그 전면적 관계의 힘 같은 것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해방일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었고요.
Q. 한 권의 소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책 한 권이 혁명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다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제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자기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30대쯤 된 남자 셋이서 투닥거리던 중에 한 친구가 중재를 하겠다고 하니 옆에 있던 친구가 “이런 공산당같이 공평한 녀석”이랬다는 거예요. 자기가 살면서 공산당을 좋은 의미로 쓰는 걸 처음 봤다면서 혹시 정지아 책 읽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는 거예요(웃음). 정말 그 남자분들이 제 책 덕분에 그렇게 말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적어도 공산당이라는 게 새빨간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괴물은 아니라는 것,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조금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 정도로만 알아도 좋겠습니다.
Q. 차기작 계획이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생각해놓은 글감들이 몇 가지 있는데 뭘 써야 대중에게 또 통할까 이런 고민들을 했었는데, 친한 선배가 말하기를 가수 싸이가 아직까지도 ‘강남 스타일’이 왜 떴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그 말을 듣고 깨달음이 왔어요. ‘소설이 왜 떴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냥 나답게 쓰면 되는 거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저는 굉장히 고상하고 지적인 걸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늘 위를 보고 살았는데, 땅에 좀 털퍼덕 주저앉아서 세상을 둘러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높은 하늘을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올려다보면 몸이 아프잖아요. 다리도 아프고 목도 아픈데 보이는 건 조금밖에 없거든요. 근데 땅바닥에 주저앉으면 하늘도 보이고 땅도 보이고 주변도 둘러볼 수가 있어요. 사람을 살리는 것들도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더라고요.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더 따뜻하고 더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보자. 다음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지만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요즘 젊은 세대들이나 광주일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애쓰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바쁘게 살면 오히려 보이는 게 없습니다. 비행기로 유럽에 가면 구름밖에 보지 못해요. 한 시간을 천천히 걸으면 오만 것들이 다 보입니다. 우리는 잘살려고 바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데 외려 그 속도와 노력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쉬엄쉬엄 살아도 좋은 사람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요즘 주변에 가만있는 사람들이 잘 없더라고요. 나이 들어서도 뭘 자꾸 배워요. 빠른 시일 내에 서구 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좀 누리고 즐겨도 되지 않을까요.
◇정지아
소설가.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출신인 아버지 정운창(2008년 작고)씨와 남부군 정치지도원 출신 어머니 이옥남(98·이옥자)씨의 외동딸. 2011년 구례에 돌아와 어머니를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심훈문학대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오영수문학상, 5.18 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효 기자 1018hyohyo@gmail.com
참 오랜만이다. 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웃고 웃느라, 결국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어 버렸다. 정지아 작가가 무려 32년 만에 ‘각 잡고’ 발표한 소설답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이면서 혁명전사였던 아버지가 노동절 새벽에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생의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된다. 선 굵은 역사적 서사에 톡 쏘는 청량음료 같은 가벼움이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념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국엔 나약하고 또 강인한 인생 이야기가 보인다.
첫 장편소설 이후 3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정지아 작가도 달라졌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식을 특유의 위트와 발랄함으로 시종일관 웃음과 감동을 전한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많은 에피소드는 서글프지만 웃기고, 울분이 솟다가도 “긍게 사람이제.” 한마디로 상황 종료되는 것이 시트콤을 연상시킨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가 무심한 듯 다정한 작가를 닮았다.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며 장르가 된 정지아 작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강연이 늘었다는 것만 다를 뿐 전과 다름없이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작은 텃밭도 가꾸고요. 고양이 네 마리와 강아지와 엄마를 먹여 살리면서요. 상추는 무성하게 자라서 집에 오는 지인들 모두 챙겨주죠. 조금 있으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호박잎 쌈도 맘껏 먹을 수 있겠네요. 자연은 잠시도 똑같을 때가 없습니다. 바람에 따라 햇빛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죠. 우리집 고양이들과 창가에 앉아 순간순간 달라지는 자연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엄마가 조금씩 늙어가는 일은 가장 큰 서글픔이고요. 좋은 것만 볼 수는 없겠죠. 슬픔도 기쁨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 |
32년 전, <빨치산의 딸>은 제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실록이거든요. 그분들이 왜 해방 정국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싸웠는가 이 기록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옳든 그르든 공이든 과든 역사는 다 기록되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까지는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요. 빨치산 부모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빨치산 얘기를 다시 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신념을 가졌던 사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신념이 구체적인 삶의 관계 속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은 아버지와 평생 불화했던 딸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3일 동안 손님을 맞으면서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 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자식들이 그러하듯이요.
![]() 정지아 작가의 부모님 <정지아 작가 제공> |
모든 소설은 작가 입장에서 재해석된 에피소드들이라서 부모님 얘기도 70프로 정도 사실입니다.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허구인데 소설 속 화자의 어린 시절 추억은 실제에 가깝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일찌감치 화해한 반면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가진 채 성장하면 화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화자처럼 저도 처음에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죠.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감옥에 가셔서 중3 때 나오셨어요.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고 나서 일상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철이 들어서 처음으로 보게 됐는데 그냥 너무 좋은 사람인 거예요. 이를테면 눈 내리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온 동네 눈 다 쓸고, 남의 집 일을 내 일처럼 하는 사람 있잖아요. 어머니는 그래도 딸이 우선이라서 맛있는 음식도 따로 챙겨두는 분이었는데 아버지는 손님 오면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데올로기가 뭔지 몰랐지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이라면 대단히 나쁜 죄는 아닐 것이다 이러면서 인간적으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가서는 한국 현대사 책을 많이 읽었는데 당시 역사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아버지와의 사이는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Q. “아버지가 죽었다.” 소설 첫 문장이 주는 강렬함이 큰데요?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한 게 사실은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나서 며칠 동안 생존해 계셨거든요. 근데 의식이 없는 상태죠. 그때 아버지 옆에서 느낀 게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첫 시작을 아버지가 다쳤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시작해 보기도 하고, 시속 180~200킬로미터 속도로 안갯속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장면에서도 시작해 보고, 의식 없는 아버지를 처음 대면한 순간도 생각해 봤는데 너무 무거운 거예요. 이번 소설은 좀 가볍고 경쾌하게 쓰려고 작정을 했었거든요. 그래야 요즘 친구들도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까 고민하다가 문득 “아버지가 죽었다”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일부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도 아니고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한 건 더 냉정하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렇게 썼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한 생명의 마지막이 안 무거울 수가 없잖아요. 아버지가 죽었다고 썼는데 이것도 가벼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이걸 가볍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다가 좀 우스꽝스럽게 죽는 상황을 추가하면 죽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뒷 문장까지 완성했습니다.
Q. 마지막도 자유로운 혁명가 아버지다운 엔딩이었던 것 같아요?
엔딩은 소설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이데올로기든 무엇이든 간에 좌든 우든 간에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고 하는 것이잖아요. 그게 산속에서 고결하게 나의 동지들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고요. 또 하나는 어쨌든 사회주의는 진작에 끝났지만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에 대한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잖아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후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 기왕이면 가장 소외된 사람, 미성년자이고 여성이고 그리고 심지어 다문화 가정의 아이를 통해서 공평한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이어가면 좋겠다는 의미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근데 제 아버지는 묶인 데가 없었던 분이라 사실은 이념적으로 해방될 필요가 없었어요. 다만 이념이라는 것도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모든 사람의 죽음이 욕망과 고통이 내재된 생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해방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남도의 구성진 사투리가 소설 인기에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전에 썼던 소설들에도 전라도 사투리가 등장하는 소설들이 몇 편 있었어요. 저희 할머니가 1900년생이시거든요. 유관순 누나가 1902년생이세요. 근데 유관순 누나는 1919년에 돌아가셨지만 저희 할머니는 1991년에 돌아가셨어요. 제 고향이 반내골이라고 되게 작은 동네인데 13살에 시집오셔서 그 동네에서만 거의 80년 가까이를 사셔서 구례 사투리를 정확하게 쓰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로 하는 건 까먹었지만 할머니의 사투리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어요. 또 요즘에는 제가 살고 있는 구례에서 친해진 도서관 사서분이 계신데 사투리를 되게 맛깔스럽게 잘해요. 그래서 제가 수시로 전화해서 구례 사투리 번역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Q.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MZ세대들에게 왜 인기가 많을까요?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여전히 신기합니다. 처음에 제 책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은 이른바 386세대들이었죠. 대부분 직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된 분들인데 책을 읽으면서 아마도 자신들이 걸어왔던 청춘의 시절을 추억하면서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근데 MZ세대들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어요. 저는 젊은 세대는 진지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옹졸한 편견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중요한 현대사이지만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냥 옛 역사였던 거예요. 잘 모르니까 오히려 편견도 없었던 겁니다.
386세대 중에는 책을 사기는 했는데 딱 펼치는 순간 빨치산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냥 덮어뒀다는 분들도 계셨어요. 반면에 젊은 세대 중에는 단 한 명도 그런 분이 없었어요. 빨치산이 지리산 옆에 있는 산인 줄 알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빨치산이 프랑스어에서 왔다고 하면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제가 더 놀란 이유는 젊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빨치산이나 빨갱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봐야겠다는 거예요. 열린 사고를 가진 세대라는 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맙고 부러웠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열린 사고가 가능했던 것은 386세대가 이뤄낸 토대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386세대들이 좋아해요.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우리가 뭐라도 하나 남겼구나.
Q. 32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달라진 점이 있나요?
<빨치산의 딸>은 제가 소설이 아니고 실록이라고 수백 번을 강조해도 자꾸만 소설이라고 그러시고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제가 소설이라고 백 번을 얘기해도 자꾸 다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사가 참 마음대로 안 돼요(웃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쨌건 둥글둥글해지면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주 단순하게는 제가 20~30대 때는 불의에 눈 감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했고,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나이 들어 보니까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제가 살을 빼려고 10년째 고민하고 있는데 1킬로그램 빼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머리로는 다 생각해도 그것을 삶에서 구체화시키는 게 쉽지 않구나, 이런 거를 나이 들면서 깨닫고 있습니다.
또 이데올로기라는 상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이해하는 순간 다 풀어집니다. 부모님이 지금 세상과 맞지 않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지 꿈꿨던 세상은 아름다웠다는 걸 이해하고 나니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모두 사라졌어요. 저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부모님이 정말 큰 사랑을 주셔서 이겨낼 힘도 있는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고통이 가장 크고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고통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내가 남달리 그렇게 고통스럽게 산 것도 아니겠다 어디 가서 고생했다는 얘기는 하지도 말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이해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 정지아 작가 |
2011년에 구례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가 처음 구례에 내려온 건 어머니가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았어요. 제가 어머니의 기대에 늘 부응하지 못한 딸이었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가 곁을 지키는 일이구나 싶어서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가 정말 많이 아프셔서 일 년 정도 예상하고 구례에 내려왔는데 어머니가 점점 더 건강해지셨어요. 2년째 되니까 아픈 데가 하나도 없고, 3년째 되니까 검은 머리가 나고, 4년째 되니까 눈까지 밝아지셨어요.(웃음)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구례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구례로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 천지입니다. 섬진강변의 벚꽃길, 반야봉의 낙조, 노고단의 운해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벚꽃은 정 없어 싫고 산수유는 속없어 싫다는 동네 할매, 필요 없다고 해도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기어이 가져다주는 식당 주인, 심지어는 먹지도 못할 억센 나물을 삶으면 부드럽다고 뻥쳐서 파는 장터 할매까지, 이곳엔 사람 냄새 넘치는 이웃들이 가득합니다. 오죽하면 할매가 뻥을 치겠는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급하면 뻥도 치고 호통도 치는 것이 사람이죠.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 멘트였는데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진작 아버지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작가님에게 구례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원래 구례를 되게 싫어했습니다. 극장 하나 없고 문화생활도 할 수 없고 서울 한 번 가려면 7시간에서 8시간이 걸리고 이런 촌구석을 사랑하는 아이는 아마 거의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온 동네 사람들이 제가 빨치산의 딸인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싫어서 어머니를 졸라 서울로 전학도 갔었죠.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는 시골마을의 공동체 문화도 정말 싫어했었는데 구례에 다시 돌아와서 살다 보니까 젊은 시절의 느낌과는 또 다르더라고요.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도 제 삶의 조건이고, 그걸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거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기 모습을 꾸며내서 얘기를 하는 순간 진짜 자기는 묻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런 말조차 털어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형식적이겠어요. 서울에서는 친구들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많았는데 고향 마을에서는 사람이 왜곡되지는 않아요. 이런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이 저한테 여러 가지를 많이 깨닫게 해줬어요. 그 전면적 관계의 힘 같은 것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해방일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었고요.
![]() 정지아 작가 |
책 한 권이 혁명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다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제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자기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30대쯤 된 남자 셋이서 투닥거리던 중에 한 친구가 중재를 하겠다고 하니 옆에 있던 친구가 “이런 공산당같이 공평한 녀석”이랬다는 거예요. 자기가 살면서 공산당을 좋은 의미로 쓰는 걸 처음 봤다면서 혹시 정지아 책 읽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는 거예요(웃음). 정말 그 남자분들이 제 책 덕분에 그렇게 말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적어도 공산당이라는 게 새빨간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괴물은 아니라는 것,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조금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 정도로만 알아도 좋겠습니다.
Q. 차기작 계획이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생각해놓은 글감들이 몇 가지 있는데 뭘 써야 대중에게 또 통할까 이런 고민들을 했었는데, 친한 선배가 말하기를 가수 싸이가 아직까지도 ‘강남 스타일’이 왜 떴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그 말을 듣고 깨달음이 왔어요. ‘소설이 왜 떴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냥 나답게 쓰면 되는 거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저는 굉장히 고상하고 지적인 걸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늘 위를 보고 살았는데, 땅에 좀 털퍼덕 주저앉아서 세상을 둘러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높은 하늘을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올려다보면 몸이 아프잖아요. 다리도 아프고 목도 아픈데 보이는 건 조금밖에 없거든요. 근데 땅바닥에 주저앉으면 하늘도 보이고 땅도 보이고 주변도 둘러볼 수가 있어요. 사람을 살리는 것들도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더라고요.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더 따뜻하고 더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보자. 다음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지만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요즘 젊은 세대들이나 광주일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애쓰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바쁘게 살면 오히려 보이는 게 없습니다. 비행기로 유럽에 가면 구름밖에 보지 못해요. 한 시간을 천천히 걸으면 오만 것들이 다 보입니다. 우리는 잘살려고 바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데 외려 그 속도와 노력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쉬엄쉬엄 살아도 좋은 사람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요즘 주변에 가만있는 사람들이 잘 없더라고요. 나이 들어서도 뭘 자꾸 배워요. 빠른 시일 내에 서구 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좀 누리고 즐겨도 되지 않을까요.
![]() |
소설가.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출신인 아버지 정운창(2008년 작고)씨와 남부군 정치지도원 출신 어머니 이옥남(98·이옥자)씨의 외동딸. 2011년 구례에 돌아와 어머니를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심훈문학대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오영수문학상, 5.18 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효 기자 1018hyohy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