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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89 -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3년 11월 24일(금) 00:00
출가를 결심하고 했던 가장 큰 일은 미루고 미루던 치과 치료를 시작한 것이었다. 엉망이었던 치아 상태를 감안한다면 엄청난 대공사가 필요했다. 결국 출가하면 다시는 세상 구경 못할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치과 치료의 두려움을 이긴 셈이다.

상당한 숫자의 충치가 있었고, 빼야 할 사랑니도 3개나 있었다. 모든 치료를 두 달 안에 끝내 달라고 하니 의사는 도대체 이해불가하다는 표정으로 어디 멀리 가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무리해서 급하게 진행했지만 두 달 안에 다 끝내지 못했다. 몇몇 마무리 작업은 광주의 치과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뺏던 사랑니 중 하나를 행자기간 내내 보관했다. 속인인 내가 남긴 마지막 흔적 같아서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계속 보관할 생각이었지만, 종단에서 시행하는 3주간의 행자입소교육 기간 중 개인 소지품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당시 행자들을 관리하던 원주실에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취합하여 별도로 보관하였는데 다녀오니 사라지고 없었다. “내 사랑니 내놓으라!”고 따지는 것도 이상했지만, 사미계를 받고 나니 왠지 큰 산을 하나 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깟 사랑니 하나쯤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듯 싶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아쉬운 일이다.

출가한 뒤로는 치과 간 일이 거의 없다. 선방 다니던 시절이니 꽤 오래 전에 왼쪽 위의 어금니를 때웠던 것이 떨어져 나간 일이 있었다. 치과에 가니 나이 많은 의사가 슬쩍 들여다 보더니 때우지 않고 놔둬도 된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어쨌거나 치료를 했을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기존의 치료를 무시하는 것이 전문가의 모습답지 않게 비춰졌다. 왠지 무성의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출가 전에 제대로 치료를 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 밥을 먹다가 뭔가 커다란 돌이 씹혀서 보니 이빨 때운 것이 떨어져 버렸다. 무려 25년 만의 일이다. 25년이나 되도록 멀쩡하게 잘 버틴 것이 정말 대견했다. 더 대견한 것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가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덜컥 출가할 용기를 냈던 25년 전의 내 자신이다.

당시의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져 1998년 당시에 썼던 글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화려한 시절은 끝났다고. 일종의 포기이자 항복 선언인데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기대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뭔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과거와 같은 격렬함과 충동은 없을 듯하다. 그것은 조용히 소리 없이 내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황당한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나의 감정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위해서도 살아야겠다.’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남을 위해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내가 남을 위해 스스로를 다듬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까지 물릴 생각은 없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Freedom. At Last!’ 킹 목사가 말했다.”(1998년 5월 22일의 일기 중에서)

돌아보니 1998년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성숙해 있다. 대견하다고 격려할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반성하고 분발할 일이다.

귀가 끊어질 듯 공기가 차가웠던 1998년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행자생활 중에 왠일인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었다. 저 하늘이 저리도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은 아마도 앙상한 나뭇가지들 때문이라 혼자 생각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사랑니를 꺼내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몰랐다.

손에 굳은살이 베길 정도로 힘든 행자생활이었다. 그런 나에게 위안이 되었던 건 아무래도 이제는 추억 속에서 조차 희미하게 빛바래 버린 나의 사랑니였다. 비록 사랑니는 나를 떠나갔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사랑니 없이도 혼자 꿋꿋하게 그리고 그럭저럭, 중노릇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중현’이라는 중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1998년 봄, 서울 신촌로타리 인근의 ‘신촌치과’. 나의 출가를 든든하게 지원해준 숨은 일등 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