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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현재에 있음을 알려준 환자 - 정현호 보라안과병원 원장
2023년 11월 16일(목) 00:00
매일 아침 똑같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슷한 패턴의 옷을 걸치고, 익숙한 길을 따라 출근한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진료를 시작한다. 어제와 똑같은 것 같은 하루, 늘 반복되고 바쁜 일상 속 나만의 리프레시 방법 하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희끗해진 흰머리를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아려오기도 하고, 부쩍 자란 딸아이를 생각할 때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기도 한다.

어떤 날은 환자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환자가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번 아웃’이 올 때가 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번 아웃(burn out)’ 글자 그대로 모든 게 다 타버려 심신이 극도로 지친 날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과에 합격해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뻤던 순간도 잠시,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티면서 일하던 대학병원 전공의 1년차 여름이었다. 당시 잠이 부족하여 비몽사몽하며 응급실 당직을 하고 있었는데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눈을 다쳐 응급실을 찾아왔다. 친구와 장난치던 중 연필심이 눈에 박혔다는 것이었다. 망막 신경까지 손상된 심각한 상황에서 아이는 작고 여린 몸으로 대견하게도 큰 수술을 여러 차례 이겨냈지만, 안타깝게도 시력 회복은 어려워 보였다.

한 눈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못한 채 아파도 묵묵히 참아냈던 아이, 전공의 1년차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내가 의사로서 책임감을 넘어 처음으로 환자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순간이었다. 앞으로 아이가 겪을 고통,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시력이 회복되길 간절히 기도했던 마음과 달리 예후는 좋지 못했고 내가 의사로서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시간이 흘러 군의관 복무 3년 후 다시 망막 전임강사로 대학병원으로 복귀하였다. 또 다시 바쁜 나날의 연속에서 우연히 보게 된 차트에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는, 이제는 훌쩍 커 고등학생이 된 그 아이가 분명했다. 아이의 옆에 선 부모님 또한 흰머리가 많아지고, 주름은 늘었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진료가 끝난 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내가 주치의였는데, 기억하니?” 그러자 아이는 기억한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밝고 씩씩하게 웃었다. 너무나 잘 커준 아이에 대한 벅찬 마음에 당시에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싶다.

“씩씩하게 잘 커줘서 고마워. 살아가면서 힘든 일도 많겠지만,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랄게. 너를 빛나게 할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항상 행복하렴.”

흔히 의사는 환자를 통해 배운다고 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가 쌓는 경험과 지식 가치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지만, 내가 만난 환자가 나에게 보여 준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시력 저하, 특히 시각장애 환자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반변성, 당뇨망막병증 등 신경질환을 치료하는 망막 전문의라서 더 많이 만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때때로 그분들의 불편함에 무던해지는 나를 보며 반성하기도 한다. 또한 회복이 어려운 시각장애, 저시력 환자들의 긍정적인 마음을 보고 있으면 행복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만나는 환자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현재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