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까?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3년 11월 10일(금) 00:00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부모님께서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지 말라 하셨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는 되지 마라’고도 말씀하셨다. 당신의 자녀가 세상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셨고, 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서 잘 살아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아닌 것에 아니라고 하고 옳은 것에 옳다라고 하며, 악한 것에는 동조하지 말고 선한 것에는 언제나 힘써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고 본다.

사람들에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살고 싶은가?’라고 물어본다면, 누구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삶은 자라온 역사와 환경 그리고 사회의 분위기에 좌우되고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많고 불의가 판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우리나라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위로하며 노란 리본을 달고 하셨던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2장 15절에서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신앙의 삶을 살고 살지 않고를 떠나서 다른 못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해 주었다. 이념과 논리를 넘어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고 불의와 맞서는 게 정의였고 상식이었다. 누구도 생명의 소중함 앞에서 머뭇거리고 재난과 인재로 가족을 잃은 이들 앞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랬다. 계산하지 않고 어떤 바람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슬픔과 고통에 함께 했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1980년 5월, 우리는 대동단결했었고 모두 부둥켜안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누구도 비겁하게 숨지 않았고 살려고 힘차게 달려 도망치는 젊은이들을 ‘내 아들이요!’하며 보호하고 숨겨주었다. 만일에 우리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서 나중에 무슨 화가 닥칠까 하며 머뭇거렸다면 지금의 안녕과 평화를 찾아볼 수 있었을까. 중립을 지키려는 이유가 ‘나만 아니면 된다’ 또는 ‘다행히 잘 넘어 갔다’는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 ‘너’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고통을 당하거나 겪을 수 있는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립은 방치이고 무관심이며 절망이 되어 폭력과 무자비함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누구도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확장하여 생각해보면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데 중립을 지키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조건 없는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밝은 미래를 만들어낸다. 지속적인 나눔은 다시 살 수 있도록 일으켜 주어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런데 사랑과 나눔에 중립을 지키게 된다면, 사랑은 더 이상 새로움을 잃고 생명도 탄생하지 못할 것이고, 나눔은 희망조차 포기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머뭇거리다가 우리의 삶은 빛이 없는 어둠이 될 것이고 슬픔과 고통으로 비참해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매일 급변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우리의 무분별한 소비와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탐욕은 환경을 오염시켜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상 기온이 발생하여 이제는 자연 재난에 누구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지난 10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세계가 붕괴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유엔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또한 ‘기후 위기는 정의의 위기다’라고 주장했다. 유엔 사무총장도 교황의 기후 위기의 한계점에 가까워졌다는 말에 “인류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경고했다. 모두가 고통을 당할 것이 예측된다. 그렇다면, 충분히 예측되는 우리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