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의 광주 속살 순례기] 광주 축구전용구장과 뽀올~
<5> ‘언저리와 변두리’ 시즌 2
구장 좁아서 탄생한 짧고 빠른 패스 강점 ‘광주식 축구’
FC 서울 팬들 ‘광주 진압’ 도발에
발칵 뒤집힌 광주 팬들 버스 가로막기
경기 후 망월묘역 참배 끌어내기도
특급 미드필더 윤정환·고종수 배출
한국축구 신화 탄생지 광주, 풍암동
구장 좁아서 탄생한 짧고 빠른 패스 강점 ‘광주식 축구’
FC 서울 팬들 ‘광주 진압’ 도발에
발칵 뒤집힌 광주 팬들 버스 가로막기
경기 후 망월묘역 참배 끌어내기도
특급 미드필더 윤정환·고종수 배출
한국축구 신화 탄생지 광주, 풍암동
![]() 광주시 서구 풍암동 월드컵경기장 옆에 자리한 광주 FC 축구 전용구장.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
한번은 브라질 하고도 고원 도시 상파울루와 삼바 보사노바 음악의 성지 리우데자네이루를 갔었다. 여행자들은 대번 우라질을 외치고 마는데, 하도 치안이 안 좋아 우라질 것 무섭기 때문. 세상에나 경찰 마크에 해골이 그려져 있고, 공포탄 말고 실탄이 장전되어 있다. 쌍방이 총질을 안 하기로 약속한 곳은 축구 경기장뿐. 요상하게도 축구장에서만큼은 승부를 착착 가르고, 승복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브라질이 축구를 잘하는 건 즐겨서만이 아니라 축구에 진심이기 때문. 또 축구공으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야 친해지는 관계란다.
내 어린 동무들은 봤으니 내 말을 믿겠으나 책만 줄기차게 읽던 청년기의 나를 본 동무들은 믿지 못하는 게 하나 있는데, 축구에 진심이었고 공도 제법 잘 찼다는 거다. 땅끝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도 가끔 운동장 플라타너스 그늘에 털부덕 드러눕거나 그물도 없던 축구 골대에 쏘아대던 대포알 축구공이 꿈에 되살아나곤 해.
동네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청소년들이 교회에 몰리도록 꼬드길 요량으로 꾸준히 축구공을 댔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동네 FC 구단주나 되는 줄 알았어. 축구공을 다량으로 그물망에 넣어 둔 걸 한 개씩 꺼내 아이들에게 던질 때 그게 그렇게 멋져 보이덩만. 팬티 바람으로 십자고상에 매달린 예수는 축구 선수처럼 보였고, 그의 두 손의 핏자국은 태클에 걸려 넘어지다 다친 모양이다 싶었으며, 그의 이마에 난 핏자국은 헤딩을 하다 다친 거시기로 보였다. 또 일그러진 표정은 전후반 90분을 끝내고 연장전에 돌입하기 직전 선수의 비장함과 흡사했다. 나는 예수가 아니라 축구 신 마라도나를 그 때부터 신앙했던 걸까.
흑백 테레비에선 독일에서 ‘차붐’이라 불리던 조상님과 브라질의 신화 펠레가 종횡무진이었다. 펠레는 누굴 주먹으로 팰래의 그 팰래가 아니라 골 득점으로 완전 넉다운 시키던 전설의 축신. 운동장에서 형들이 난투극에 가까운 축구를 하는 걸 보다가 펠레의 기교적인 축구는 가히 환상이었다. 펠레가 공을 갖고 노는 드리블을 따라 해 봤다. 동무에게 패스를 하면 내게 도로(다시) 패스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으로다가 공을 소유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골대 깊숙이 들어가 넣으라며 패스를 해주면 매번 헛발질. 엣다 밥~ 입에 다 넣어줘도 못 먹는 팀이라 쫄딱 망할밖에. 나는 일찌감치 동급을 만나러 축구 유학을 갔어야 했나봐. “흑흑, 내 인생 돌리도~”
축구장에 놀러 가면 모두가 반갑다. 한 엄마가 딸에게 이르기를 “애야! 모르는 사람이 혹시 너에게 말을 걸면 절대 대꾸하지 말아라.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다.” 딸이 답하길, “엄니! 모르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세요. 그래야 엄니 말씀대로 할 테니깐.” 축구장에 가면 다 아는 사람.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 축구공을 안고 자는 착한 사람들뿐이야. 세상이 암만 무서워도 축구장은 안 무서워. 우린 해외와 달리 폭동에 가까운 훌리건이 없다. 다만 광주 축구장에선 따끔한 훈계의 사건이 하나 있었지. FC 서울이 광주 상무와 원정경기 직전, 5월 18일 공식 게시판에다 ‘5월 20일 광주 진압 계엄령’이란 제목으로 도발 글을 달았다. “서울 전사들이 5월 20일 또다시 광주 진압하러 갑니다” 뭐라고 진압? 이를 본 광주 팬들은 발칵 뒤집힘. 원정을 보러 찾아온 서울 팬들을 버막(버스 가로막기), 경기 후에 망월묘역을 참배하게끔 만들었다. 무식한 짓을 두 번 다시 못 하도록 말이다.
요곳에서는 볼이라 안부르고 뽈이라 부르며, 기분 좋을 때는 ‘뽀올’이라고 늘어 뺀다. 이겼을 때는 “아따메이~ 배암을 고아 잡샀는가 뽀올이 짜악 휘어가꼬 그물에 안겨 불드랑게” 하면서 즐기는데 반하여, 졌을 때는 “씬찬하네 증말. 징상스럽게 뽈도 못차고 말이여. 여가 먼 이북인가메 골대 앞에서 공중으로 미사일을 쏴대고 쥐랄이여.” 하면서 괴로워들 한다. “감독님이 비민히 알아 잡숩고 조처를 허시겄어. 다음뻔 경기를 지달래보자고잉” 헤어질 때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눈인사들을 나눈다.
쑥써리바람(회오리바람) 불 듯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승리를 거머쥘 때 쯤엔 핸비짝(한쪽)에 찌그러져 있다가 가운데로 달려드는 속도를 보라. 슈퍼맨이 일없이도 지구를 일곱바퀴 반 도는 것보다 빠르게 우와와~하고 몰려들어.
좋은 팀은 좋은 응원 부대를 가지기 마련. 선거에 떨어진 국회의원이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다지. “이번 선거에 저를 찍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를 찍지 않으신 분들께는 제 아내가 감사드린다고 전하랍니다.” 우스갯소리. 끝까지 지지하는 의리의 응원 부대는 드물다.
광주 프로구단이란 게 군인조직 상무로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서포터즈 응원단이 약했다. 이후 시민구단이 생기고 낙하산 인사들로 그나마 있던 서포터즈도 줄행랑. 열악한대로 ‘빛고을 서포터즈’가 시방 하나 남아 있는데, 진정성이 대단하다. 이들의 지고지순 뜨거운 응원 덕분일까. 요즘
광주 FC는 대단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풍암동 월드컵경기장 뽀짝 옆자리, 광주 FC 축구전용구장이 있다. 보니(수컷 봉황)와 화니(암컷 봉황)가 반기는 팬샵 ‘꼬꼬네’에서 응원 도구나 유니폼을 한 벌 사 입고 전용구장에 들어가면 놀라게 되는 게 ‘아~ 좁다, 근데 시야는 넓네’. 비교적 뒤늦게 지어졌음에도 열악한 시설, 전국 축구 팬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 이 잔디밭 위에서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광주 FC는 강등과 승격을 반복해가며 ‘한국의 노리치 구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3번의 강등과 3번의 승격이라는 오뚝이 전법. 쉽게 무너지지 않고 동앗줄처럼 질긴 생명력.
듣자 하니 특유의 ‘광주식 축구’란 게 있단다. 롱 패스로 뻥뻥차면서 공격하는 그런 축구가 통상이라면 광주식 축구는 미드필드를 공략하는 잔발 패스 전법을 쓴다. 그래서 역사상 특급 미드필더로 불리는 윤정환과 고종수, 이승기 등을 낳았다. 아기자기 기술적이며 볼을 예쁘게 찬다는 소릴 듣고 있다. 요새 유행하는 패스 축구를 하는 곳이 바로 광주 FC. 전용 구장이 좁다 보니 공수전환이 매우 빠른 맨시티나 아스날식 축구를 체득하게 된 아이러니. 노란 물결이 넘실대는 구장에서 이정효 감독이 이끄는 더비 경기는 볼만한 정도를 후딱 넘어선다.
헌신적인 주장 박지성에 이어 특급 공격수 손흥민은 현재 유럽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 브라질 월드컵을 끝내고 손흥민의 회고담 일부, “우리가 왜 브라질에서 실패했을까. 무엇보다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 선수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온 군인의 눈빛이었다. 투철한 정신력이 한국축구의 전통이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러나 월드컵에 나가보니 대부분 그 정도 정신력은 기본이었다. 그 이상의 정신력과 기술을 가져야 했다.” 앞으로 월드컵에 광주 FC 출신 선수들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그 이상’을 해내는 정신력, 기술을 지닌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길...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의 주장 메시. 그는 어려서 외할머니가 처음 축구공을 선물해줬다고 해. 그 전에는 레몬을 따서 축구를 했다지. 왼발 터치 오른발 터치, 레몬을 축구공 삼아 드리블 연습을 했단다. 생일마다 외할머니가 선물해준 축구공이 닳고 터져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지. 메시가 원하는 선물은 오로지 축구공뿐. 우리나라도 레몬 대신 주먹 크기 우유 곽(팩)을 공 삼아 차던 아이들이 자라나 월드컵의 주역이 되었다.
지난 2002년 6월 22일 광주에서 열린 월드컵 8강전을 기억하는가. 연장전 이후 승부차기. 이집트인 자말 주심의 휘슬이 불자 홍명보가 공을 향해 뛰어갔다. 스페인의 명장 골키퍼 카시야스가 반대편 그물을 향해 날아가는 공을 빤히 쳐다봐야 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는 순간이었다. 직관했던 광주 시민들은 널 뛰듯 공중부양. 아시아축구연맹 회원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건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유일무이 독보적. 그랬던 곳이 바로 이곳 광주, 하고도 풍암동 되시겠다.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 임의진 작 ‘펠레와 체 게바라’ |
축구장에 놀러 가면 모두가 반갑다. 한 엄마가 딸에게 이르기를 “애야! 모르는 사람이 혹시 너에게 말을 걸면 절대 대꾸하지 말아라.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다.” 딸이 답하길, “엄니! 모르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세요. 그래야 엄니 말씀대로 할 테니깐.” 축구장에 가면 다 아는 사람.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 축구공을 안고 자는 착한 사람들뿐이야. 세상이 암만 무서워도 축구장은 안 무서워. 우린 해외와 달리 폭동에 가까운 훌리건이 없다. 다만 광주 축구장에선 따끔한 훈계의 사건이 하나 있었지. FC 서울이 광주 상무와 원정경기 직전, 5월 18일 공식 게시판에다 ‘5월 20일 광주 진압 계엄령’이란 제목으로 도발 글을 달았다. “서울 전사들이 5월 20일 또다시 광주 진압하러 갑니다” 뭐라고 진압? 이를 본 광주 팬들은 발칵 뒤집힘. 원정을 보러 찾아온 서울 팬들을 버막(버스 가로막기), 경기 후에 망월묘역을 참배하게끔 만들었다. 무식한 짓을 두 번 다시 못 하도록 말이다.
요곳에서는 볼이라 안부르고 뽈이라 부르며, 기분 좋을 때는 ‘뽀올’이라고 늘어 뺀다. 이겼을 때는 “아따메이~ 배암을 고아 잡샀는가 뽀올이 짜악 휘어가꼬 그물에 안겨 불드랑게” 하면서 즐기는데 반하여, 졌을 때는 “씬찬하네 증말. 징상스럽게 뽈도 못차고 말이여. 여가 먼 이북인가메 골대 앞에서 공중으로 미사일을 쏴대고 쥐랄이여.” 하면서 괴로워들 한다. “감독님이 비민히 알아 잡숩고 조처를 허시겄어. 다음뻔 경기를 지달래보자고잉” 헤어질 때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눈인사들을 나눈다.
쑥써리바람(회오리바람) 불 듯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승리를 거머쥘 때 쯤엔 핸비짝(한쪽)에 찌그러져 있다가 가운데로 달려드는 속도를 보라. 슈퍼맨이 일없이도 지구를 일곱바퀴 반 도는 것보다 빠르게 우와와~하고 몰려들어.
좋은 팀은 좋은 응원 부대를 가지기 마련. 선거에 떨어진 국회의원이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다지. “이번 선거에 저를 찍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를 찍지 않으신 분들께는 제 아내가 감사드린다고 전하랍니다.” 우스갯소리. 끝까지 지지하는 의리의 응원 부대는 드물다.
광주 프로구단이란 게 군인조직 상무로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서포터즈 응원단이 약했다. 이후 시민구단이 생기고 낙하산 인사들로 그나마 있던 서포터즈도 줄행랑. 열악한대로 ‘빛고을 서포터즈’가 시방 하나 남아 있는데, 진정성이 대단하다. 이들의 지고지순 뜨거운 응원 덕분일까. 요즘
![]()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강등과 승격을 반복해가며 역사를 쓰고 있는 광주 FC 선수들. <광주 FC 제공> |
풍암동 월드컵경기장 뽀짝 옆자리, 광주 FC 축구전용구장이 있다. 보니(수컷 봉황)와 화니(암컷 봉황)가 반기는 팬샵 ‘꼬꼬네’에서 응원 도구나 유니폼을 한 벌 사 입고 전용구장에 들어가면 놀라게 되는 게 ‘아~ 좁다, 근데 시야는 넓네’. 비교적 뒤늦게 지어졌음에도 열악한 시설, 전국 축구 팬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 이 잔디밭 위에서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광주 FC는 강등과 승격을 반복해가며 ‘한국의 노리치 구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3번의 강등과 3번의 승격이라는 오뚝이 전법. 쉽게 무너지지 않고 동앗줄처럼 질긴 생명력.
듣자 하니 특유의 ‘광주식 축구’란 게 있단다. 롱 패스로 뻥뻥차면서 공격하는 그런 축구가 통상이라면 광주식 축구는 미드필드를 공략하는 잔발 패스 전법을 쓴다. 그래서 역사상 특급 미드필더로 불리는 윤정환과 고종수, 이승기 등을 낳았다. 아기자기 기술적이며 볼을 예쁘게 찬다는 소릴 듣고 있다. 요새 유행하는 패스 축구를 하는 곳이 바로 광주 FC. 전용 구장이 좁다 보니 공수전환이 매우 빠른 맨시티나 아스날식 축구를 체득하게 된 아이러니. 노란 물결이 넘실대는 구장에서 이정효 감독이 이끄는 더비 경기는 볼만한 정도를 후딱 넘어선다.
헌신적인 주장 박지성에 이어 특급 공격수 손흥민은 현재 유럽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 브라질 월드컵을 끝내고 손흥민의 회고담 일부, “우리가 왜 브라질에서 실패했을까. 무엇보다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 선수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온 군인의 눈빛이었다. 투철한 정신력이 한국축구의 전통이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러나 월드컵에 나가보니 대부분 그 정도 정신력은 기본이었다. 그 이상의 정신력과 기술을 가져야 했다.” 앞으로 월드컵에 광주 FC 출신 선수들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그 이상’을 해내는 정신력, 기술을 지닌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길...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의 주장 메시. 그는 어려서 외할머니가 처음 축구공을 선물해줬다고 해. 그 전에는 레몬을 따서 축구를 했다지. 왼발 터치 오른발 터치, 레몬을 축구공 삼아 드리블 연습을 했단다. 생일마다 외할머니가 선물해준 축구공이 닳고 터져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지. 메시가 원하는 선물은 오로지 축구공뿐. 우리나라도 레몬 대신 주먹 크기 우유 곽(팩)을 공 삼아 차던 아이들이 자라나 월드컵의 주역이 되었다.
지난 2002년 6월 22일 광주에서 열린 월드컵 8강전을 기억하는가. 연장전 이후 승부차기. 이집트인 자말 주심의 휘슬이 불자 홍명보가 공을 향해 뛰어갔다. 스페인의 명장 골키퍼 카시야스가 반대편 그물을 향해 날아가는 공을 빤히 쳐다봐야 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는 순간이었다. 직관했던 광주 시민들은 널 뛰듯 공중부양. 아시아축구연맹 회원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건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유일무이 독보적. 그랬던 곳이 바로 이곳 광주, 하고도 풍암동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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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