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상)-비겔란 조각공원] 기쁨·슬픔·분노…인간의 희노애락이 살아 숨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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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상)-비겔란 조각공원] 기쁨·슬픔·분노…인간의 희노애락이 살아 숨쉬다
‘자연주의 조각 거장’ 비겔란 예술혼 깃든 글로벌 랜드마크
10만 여 평 규모…40여 년간 제자와 작업한 걸작 212점 전시
“시민에 무료 개방” 비겔란 유지 받들어 오슬로 시 건립
2022년 11월 06일(일) 23:00
오슬로시 근교에 자리하고 있는 비겔란 조각공원은 출생에서 부터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애를 한편의 파노라마 처럼 표현한 조각상 212점이 들어서 있다. 비겔란 조각공원의 아이콘인 17.3m 높이의 ‘모놀리트’(Monolith).
작곡가 그리그, 극작가 입센, 화가 뭉크, 조각가 비겔란.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들은 세계 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노르웨이 출신의 거장이다. 그중에서도 ‘북유럽의 로댕’으로 불리는 구스타프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조각가이다. 자연주의적 얼굴과 인체를 주제로 작업해온 그는 ‘요들에서 무덤까지’를 모토로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으로 표현했다. 그의 유산을 모태로 1943년 212점의 작품으로 꾸민 비겔란 조각공원은 단일 작가 공원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오슬로 중앙역에서 12번 트램을 타고 40분간 달리자 프로그너 공원(Frogner Park)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잡한 시내 중심가와 달리 한적한 주택가와 인접해 있는 오슬로의 대표적인 공립 공원이다. 일명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Scrupture Park)으로 더 유명한 이 곳은 전체 공원 면적 13만 여 평 가운데 10만 평이 비겔란과 그의 제자 작품들로 조성됐다

트램에서 내려 정문 앞으로 다가서자 대형 관광버스들이 하나 둘씩 몰려 들기 시작했다. 석조와 철제로 마감된 출입문 앞에는 다소 이른 오전 10시인데도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한해 전 세계에서 500만 명이 다녀간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정문으로 들어선 순간, 일행으로 보이는 수십 여명의 관광객들이 한곳에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바로 이 공원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비겔란의 동상앞이었다. 망치와 조각 칼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평생 조각의 길을 걸어 온 거장의 위엄이 느껴졌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관광객들은 도슨트로 부터 비겔란의 작품세계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튤립과 장미가 가득한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성애가 느껴지는 조각상. 비겔란 조각공원에 전시된 작품들은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감상을 위해 명제가 없다.
아름다운 꽃밭을 지나면 수십 여 점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는 다리(Bridge)가 관광객을 맞는다. 화강암과 석등으로 이어진 100m 길이, 15m폭의 다리 난간에는 58점의 청동 조각상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멀리서 봐도 금방 눈에 띄는 대형 조각에서 부터 가까이 가야 볼 수 있는 작은 조각까지 각양각색의 형상이 흥미롭다. 다리 양쪽 끝의 네개 모서리에는 이무기와 인간의 모습을 소재로 한 독특한 조각들이 시선을 끈다. 시련과 고난에 직면할 때 좌절하거나 대항하는 인간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탄생, 행복, 슬픔, 광기, 분노, 절망, 죽음 등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살아 숨쉬는 듯 하다.

청동과 주철로 제작한 이들 조각상은 그 흔한 옷이나 장식구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 그대로다. 인위적인 기교 대신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표현하고 자 했던 비겔란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 212점을 구성하고 있는 600여 명의 인물도 과장이나 축소 없이 사람의 실제 크기와 같다.

다리를 따라 걷다 보면 아빠와 아들, 엄마와 아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커플, 아이들과 놀고 있는 모습의 부모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은 바로 ‘화난 아이’(Angry Boy)다. 심술쟁이라는 뜻의 Sinnataggen(노르웨이어)로 불리는 이 동상은 얼핏 4~5살로 보이는 꼬마가 주먹을 쥐고 발을 구르며 떼를 쓰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어찌나 찡그리는 아이의 표정과 동작이 사실적인지 관람객들의 웃음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한다. 인상적인 건 아이의 왼손이다. 청동 조각상이지만 마치 왼쪽 손만 따로 붙인 것 처럼 금빛으로 반짝이는데, 이는 행운을 비는 의미로 관광객들이 만지면서 색깔이 변했다고 한다.

비겔란 조각공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화난 아이’.
다리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6명의 인물이 거대한 원형 그릇을 떠받치고 있는 분수(Fountain)가 나온다. 또 주변에는 다양한 형상의 나무 조각과 인물상이 어우러져 있고, 분수 둘레에는 갓난 아기와 동물, 해골 등을 조합한 부조 작품들이 새겨져 있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은 출생에서 부터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을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냈다.

뭐니뭐니해도 비겔란 조각공원의 하일라이트는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17.3m 높이의 ‘모놀리트’(Monolith)다. 121명의 인물이 정상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듯한 조각상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정교한 조형미로 탄성을 자아낸다.

비겔란 조각공원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1921년 오슬로시와 비겔란과의 이색적인 계약이 있었다. 목수의 아들이었던 비겔란은 오슬로, 코펜하겐, 파리에서 조각을 배웠고 파리에 머물 때에는 로댕의 작품으로 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그는 오슬로 시에 ‘인생의 행로’라는 작품을 기증할 기회가 있었는 데, 이를 접한 시민들이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면서 프로그너 공원에 조각작품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조건은 시가 비겔란 조각공원을 건립해주는 대신, 작가는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작품과 앞으로 제작할 ‘미래의’ 작품들을 공원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오슬로 시는 비겔란이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과 작업실을 공원 근처에 제공했다.

망치와 조각칼을 들고 있는 구스타프 비겔란의 동상.
당시만 해도 ‘분수’ 이외에 작품 수가 많지 않았던 그는 1924년부터 조수들과 함께 새로 마련된 작업실에 거처하며 공원에 들여 놓을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 매진했다. 212점과 600여 개의 인물상은 그와 제자들이 40여년 에 걸쳐 빚어낸 땀의 결정체다.

안타깝게도 비겔란은 공원이 완성하기 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비겔란 공원의 역사적 탄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슬로시는 생전 그의 유지에 따라 무료로 공원을 개방하고 있으며 관람객들의 ‘열린 감상’을 위해 작품에 대한 명제나 해설도 붙이지 않았다.

비겔란 조각공원의 홍보 담당 신드레 후세보(Sindre Husebo)는 “비겔란 조각공원은 주로 1940~1949년 기간에 제작됐던 작품 200여 점으로 꾸며졌지만, 모태가 된 ‘분수’의 제작 시기를 감안하면 40여 년에 걸친 대장정의 결실이다“면서 “작가의 작품을 기증받거나 수집한 후 공원을 건립하는 다른 프로젝트와 달리 비겔란 조각공원은 먼저 공원건립을 설계한 후 장소에 어울리는 작품들을 수십년 간 제작해 설치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됐다”고 말했다.

/오슬로=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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