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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데이터’는 무엇일까?-김재인 철학자,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2022년 07월 12일(화) 01:00
인문학의 데이터를 ‘텍스트’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공자왈맹자왈”(孔子曰孟子曰)의 고전 텍스트 말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각각 ‘자연’과 ‘사회’에 대한 측정 자료를 근거로 한다. 누군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 “자, 이 데이터를 봐라”라고 근거를 제시한다는 말이다. 근거가 부실할 수도 있고, 부분적일 수도 있고,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근거에는 근거로 맞서고 반박한다. 그래서 ‘과학’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데이터가 매개되지 않으면, 집단 작업으로서의 과학은 실천 불가능하다. 모든 전문가가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데이터야말로 과학의 근거다.

이 점에서 과학은 ‘협업’의 실천이다. 학자들은 데이터로부터 가설과 이론을 만들고 검증한다. 그런 조각 퍼즐 맞추기가 과학의 일이고 과학의 장점이다. 이 점에서 과학은 개인 작업도 개인의 성취도 아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착안해 사회를 연구하려 한다. 인간 사회는 자연물처럼 측정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며, 많은 간섭 요인도 있기에, 사회 데이터에서 자연과학 수준의 근거를 대는 게 어렵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자연과학의 실천을 모범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데이터는 무엇일까? 주로 문헌을 연구하는 전통 인문학의 관행을 보면, ‘텍스트’가 데이터라고 오해하기 쉽다. 이런 가설은 인문학의 엄밀성에 의문을 낳는 원인이다. 고전 문헌을 다루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물어보자. 시대와 장소와 관행과 기술(技術)이 달라졌다면, 옛 문헌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과학에서 데이터로 반박된 부분은 대개 역사의 일부로 남는다. 역사학의 대상일 뿐, 더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문학이 수천 혹은 수백 년 전 문헌을 가져올 때 설득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문헌을 근거로 삼는 것이, 인문학이 비현실적이 되는 원인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문헌만 파고드는 훈고학이 아니려면 인문학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인문학은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을 데이터로 편입해야만 한다. 텍스트는 그런 실증 데이터에 부합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인문학 연구자끼리의 소소한 정담은 중요하지 않다. 정담 또한 사회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연구 결과가 전문가를 넘어 확산하지 못하면서 사회의 호응을 기대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인문학 연구자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해할 문해력도 없고, 그 지식을 활용할 의사도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동안 인문학은 그다지 ‘자생’적이지도 못했고 ‘자주’적이지도 않았으며 ‘자립’적이길 기대한 적도 없었다. 전통 인문학은 서양 인문학 제도의 수입이라는 점에서 자생적이지 않다. 지리적으로 지금 이곳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으니 자주적이지 않다. 사회에 주는 게 거의 없으면서 ‘인문학은 중요하다’라고 원조를 호소할 뿐이니 자립적이지 않다. 인문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했고, 자신의 의무를 애초부터 자각하지 못했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끌고 갈 힘이 없다.

내가 인문학의 재정의와 재정립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뉴 노멀의 철학’(2020)을 저술하고 ‘뉴 리버럴 아츠(A New Liberal Arts) 인문학의 정립: 뉴 노멀 시대 한국 인문학의 길’(2022)을 공동 연구한 것도 이 맥락이다. 인문학 자신이 ‘융합’의 주체요 현장이어야 한다. 그런 탈바꿈 없이 사회에 존재감을 주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은 현실의 삶에 지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옛날 그 어느 좋던 시절을 얘기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하는 일도 아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