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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두 죽음 - 가해자 전두환과 피해자 이광영 씨-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시인·연극인
2021년 11월 26일(금) 05:00
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시인·연극인
나는 전두환이란 양반(?)을 만나서 가정이 쑥밭이 됐다. 운명적으로 투사가 됐으며, 경찰서·교도소·국정원·보안대를 두루 섭렵했다. 자살 기도를 했지만 죽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살자. 그래서 5월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5·18기념 공연 ‘애꾸눈 광대’다. 그리고 2021년 11월 23일. 전남여고에서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다 비보(?)를 접했다. 전두환 씨의 사망 소식은 충격이었다. 분노·허탈·안타까움 속에서 공연을 마쳤다. 지나간 41년을 회상하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지현이 성님! 광영이 성님 소식 들었소?” “아니. 얼마 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쟎아?” “근디 오늘 성님이 자살해 부렀단 말이오” “뭣이? 뭐시라고? 어디서야?” “고향 저수지에서 그랬답니다. 흐흐흑” “…”

이광영 씨는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광주 증심사 승려로 활동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 그는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러 시내에 나갔다. 그리고 선량한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에 무참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불자의 양심으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상자들을 후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총상을 입었다. 정신을 잃은 채 기독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해 있던 중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적극 가담자로 분류됐다. 통합병원에서 특수 관리를 받으며 치료했다. 그러나 하반신이 마비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1급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영 씨는 이후 신체적 결함을 이겨 내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82년 부상자회 창립 일등공신으로 초대 총무를 맡았다. 85년도엔 경찰들이 묘지 참배를 방해하자, 장주인·김용대·김요한·김래향 등 ‘휠체어 5인방’이 선두에서 활로를 뚫었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행진했던 일은 신화가 되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는 88년 5공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도 했다. 전두환 씨 회고록이 빌미가 된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 훼손 공판’에서는 헬기 기총소사에 대한 증언도 했다. 불구의 몸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을 가열차게 했던 이 광영 씨. 41년 동안 불면과 고통의 세월을 감내했던 그는 마침내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적 공황에 이르자 고향의 저수지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만약 그가 광주의 비극을 외면했다면 종교 지도자로서 추앙받는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슬프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광주 학살 주범 전두환 씨는 어떠했는가? 그의 만행과 추태는 필설로 형용하기도 창피할 정도다. 진짜로 ‘아더매치’다. 그러나 주먹밥 공동체 정신으로 살아 온 우리는 ‘가해자들이 광주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면 용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전두환은 끝까지 배 째라며 오리발로 일관했다. 천수를 누릴 것 같던 그는 마침내 화장실에서 숨을 거뒀다.

기해자 전두환 씨는 아주 편안하게 죽었다. 이에 비해 피해자 이광영 씨는 기나긴 고통 끝에 갔다. 억울하고 불공평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그는 달관이라도 했는지 유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홀가분하다.”

늦었지만 ‘광주 학살 원흉 전두환’이 하늘에서라도 이광영 씨와 피해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길 바란다. 우리 또한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진상 규명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5월 가족들의 극단적 선택이 더 이상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