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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스 전력의 마지막 퍼즐은 팬심이다-윤영기 특집·체육부장
2021년 11월 03일(수) 00:30
AI 페퍼스 여자 프로배구단이 아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를 하고 있다. 최근 세 경기를 치르는 동안 1세트를 따낸 게 유일한 전과다. 나머지 두 경기는 내리 3세트를 내주고 3-0으로 무릎을 꿇었다. 인공지능(AI)처럼 코트를 훤히 꿰뚫고 손발이 척척 맞는 플레이를 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후추(Pepper)처럼 화끈한 경기를 기대하기도 당분간 어려울 전망이다.

국내 프로배구단 감독들은 시즌 초 최약체로 AI 페퍼스를 꼽았다. 눈에 띄는 주전 선수가 없고 팀워크를 다질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체전에 참가한 신인 여섯 명이 복귀한 지난달 14일에야 선수단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사실 데뷔 자체가 무리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창단 첫 경기에서 KGC 인삼공사를 상대로 1세트를 따냈다.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게다.

열렬한 관심과 응원으로 지켜 내야

페퍼스는 창단 팀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를 받아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상위권 선수 여섯 명을 쓸어 담았다. 언뜻 보면 외형은 화려했다. 하지만 세터 박사랑을 제외하고 난 나머지 선수들은 예년 같으면 지명받기 힘든 선수들이라는 게 중론이다. 올해는 해거리 현상이 유독 심해 애초 큰 재목감이 드래프트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냉정하게 전망하자면 페퍼스 팬들은 앞으로 더 심한 열패감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페퍼스는 KGC인삼공사의 20연패(여자 프로배구 최다 연패) 불명예 기록을 깰 수도 있다. 배구는 잘 알다시피 조직력의 스포츠다. 빼어난 선수 한 명이 잘한다고 해서 이기는 경기가 아니다. 공은 둥글고 승부는 예측할 수 없다지만, 배구에서는 통하지 않는 얘기다. 더구나 야구처럼 10-0으로 졌던 팀이 다음날 같은 팀을 10-0으로 꺾는 ‘도깨비놀음’은 배구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페퍼스의 앞날이 밝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진정한 응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대한민국 여자배구 팀은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에서 터키를 극적으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설령 졌다고 해도 그다지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 터키는 우승 후보였고 대한민국은 한 수 아래 팀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이 현실을 직시하고 응원했다. 그랬기에 감동이 더 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페퍼스도 같은 눈높이로 봐야 하는 신생 구단이다.

승패라는 시각을 걷어 내고 보면 AI 페퍼스 선수들에게는 대부분 인생유전이 있다.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겠지만, 멤버 대부분이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들이다. ‘외인 구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이들 대부분은 원소속 구단에서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누군들 후보에 머무르고 싶었을까마는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 인생과 닮아 애잔한 구석이 있다. 이들에게 이미 예견된 패배를 질책하는 것보다는 희망을 키우도록 박수를 보내고 격려해 주는 게 더 필요한 시점이다. KIA타이거즈와 광주 FC가 바닥권을 헤매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열받는다’며 짜증을 낼 필요가 없다. 또 하나 꼴찌 팀이 추가됐다고 외면하면 오히려 선수에게도 팬들의 마음에도 독이 될 것이다.

막내 구단의 패배 계속되고 있지만

페퍼스는 다른 팀에 비하면 장기간인 5년 동안 연고지를 유지하기로 광주시와 계약을 맺었다. 약속 기간이 경과하면 여자 농구팀 신세계 쿨캣이 2006년 홀연 광주를 떠나 부천으로 연고지를 옮긴 것처럼 갑자기 떠날 수도 있다. 이런 전례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페퍼스를 사랑하는 팬들의 열렬한 응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마치 독일 3부리그 팀인 뒤나모 드레스덴의 팬들처럼.

뒤나모 드레스덴은 지난해 말 홈구장에서 열리는 다름슈타트와의 독일축구협회(DFB) 포칼 2라운드(32강)의 티켓 7만2112장을 팔았다. 홈 구장이 총 3만2249석 규모이니 좌석수보다 두 배 넘게 팔린 셈이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으로 치러지는 경기였지만 팬들은 재정난을 겪고 있던 구단이 제시한 특별티켓을 기꺼이 구입했다. 이런 애정을 보여 주는 팬들이 있는 한 그 팀은 연고지를 쉽게 떠나지 못할 것이다.

프로 구단은 팬들이 외면하면 바로 연고지를 버릴 수 있다. 페퍼스도 예외는 아니다. 페퍼스가 떠나게 되면 초등학생 팀과 실업 팀 창단을 추진하고 있는 광주 배구계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광주는 또다시 동계 실내스포츠 불모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페퍼스를 지키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을 찾아 배구를 즐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