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강진객사 ‘금릉관’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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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진객사 ‘금릉관’ 위치는?
경찰서 일부·뒤편 주차장 확인
강진경찰서 이전 군민토론회
군민들 ‘금릉’관 복원 요구
2021년 07월 14일(수) 23:10
조선시대 강진 객사인 금릉관 위치가 강진경찰서 일부와 뒤편 주차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9일 개최된 ‘강진객사 금릉관 복원을 위한 경찰서 이전 군민토론회’에서 나왔다.

이번 토론회는 ‘강진객사 금릉관 복원을 위한 경찰서 이전 군민모임’(공동대표 차봉근 전 전남도의회 의장, 강영석 전 강진군의회 의장, 마삼섭 강진효도회회장, 위성식 강진군 의회 의장) 등 민·관이 함께 참여해 주제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됐다.

강진군 이재연 학예연구사가 ‘강진현 객사 금릉관’ 진행자로, 토론은 문화재 전문위원이자 고건축 권위자인 조선대 건축학과 신웅주 교수가 진행했다.

연구사 발표에서 조선후기 ‘강진현 지도’와 ‘호남읍지’, 1898년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을 근거로 강진현 객사의 명칭은 ‘금릉관’이였다고 발표했다. 일제가 만든 ‘지적원도’와 ‘조선사진엽서’를 검토한 결과 객사의 위치는 현 경찰서 일부와 태양광 주차장 인근이며 그 규모는 15칸(정청 3칸, 동익헌 7칸, 서익헌 5칸)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신웅주 교수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객사와 동헌을 위시한 공해의 배치 관계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근거자료를 통해 복원을 위한 초석을 닦는데 힘을 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객사가 있던 ‘강진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병영성’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강진경찰서는 1923년 이곳 ‘객사 터’에 들어선다. 일제가 임금의 ‘전패’를 모시는 객사 터에 굳이 경찰서를 만든 까닭은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하고 헌병경찰 통치방식의 일종으로 민족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서 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군민모임은 지난 6월 출범과 동시에 경찰서 이전을 위한 군민 서명운동, 사회단체 참여 독려, 현수막 게시, 언론 보도 등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군민모임 공동대표들은 “강진경찰서 자리는 예전 강진군을 대표하는 금릉관이라는 객사가 위치한 장소로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지역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강진군민의 역할이다”고 주장했다.

/강진=남철희 기자 chou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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