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종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너무나도 ‘오월 광주’ 닮아 더욱 슬픈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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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종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너무나도 ‘오월 광주’ 닮아 더욱 슬픈 미얀마
2021년 03월 24일(수) 06:00
코로나19가 시작된 지난해 1월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감염자 수를 확인하는 게 일과가 됐다. 날마다 이메일로 날아든 방역 당국 브리핑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다. 신문 방송 뉴스를 보면서도 ‘오늘은 확진자 수가 줄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사회부라는 업무 특성상 인명 피해가 가장 중요한 체크 포인트라 생긴 습관이다.

한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미얀마 뉴스를 챙기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달 전쯤, 미얀마 군부 쿠데타 직후 시위 과정에서 첫 희생자가 나왔다는 외신을 접했을 때만 해도 으레 독재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고려니 했다. 하지만 희생자는 꾸준히 늘어 최근 250명을 넘어섰다. 그러니 연일 미얀마 외신을 체크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의 금희와 미얀마의 태권소녀

미얀마 시위에 눈길이 가는 것은 희생자가 많다는 이유도 있지만 5·18민주화운동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40년 전 광주의 악몽이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미얀마에서 되풀이되는 기시감을 느낀다. 미리 짜놓은 각본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군부 쿠데타 이후,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군사정권의 학살이 시작되고. 도심 한 복판에 등장한 장갑차와 대검이 장착된 소총을 든 군경, 곤봉으로 시민을 구타하는 진압군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마조마했던 우려가 끝내 현실로 닥쳤으니, 결국 정조준 사격으로 숨지는 시민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살육에 맞서 연일 벌어지는 장엄한 저항의 물결은 5·18의 도시 광주의 가슴을 울린다.

미얀마 군부의 시위대 진압은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권의 장악을 위해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시위대 해산이나 무력화 수준을 넘어 아예 제거를 통해 저항의 싹을 자르기 위함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광주에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작전 전면에 배치했는데, 그 부대원 중 일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미얀마 군부도 소수민족 반군과 교전했던 정예부대와 잔혹하기로 유명한 보병사단을 시위 현장에 투입했다.

양국의 진압군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머리를 정조준해 살인하는 등 마치 적과의 전쟁을 치르듯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흥분한 군인들은 시위대 외에 주택가에도 무차별 난사해 집안에서 총을 맞아 숨지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광주 5·18 때에도 이성을 잃은 계엄군이 주택에 총을 난사해 사망자가 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던 전남대병원 응급실에서도 총을 난사해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언론을 통제하면서 외부 국가의 개입 전에 국내 상황을 수습하려는 군부의 조바심이 학살로 이어지는 모습도 판박이처럼 닮았다. 시위에 앞장선 고교생과 대학생이나 시위와 무관한 주부 등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수많은 희생자 중 유난히 광주 시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죽음이 있다. 지금도 우리 기억에 남아 살아 숨쉬는 ‘5월의 금희’와도 같은 미얀마 ‘태권 소녀’.

광주 춘태여상 3학년이던 박금희(당시 18세)는 1980년 5월 당시 수차례 헌혈을 했었다. 5월21일 오후에도 부상자가 많아 혈액이 부족하다는 가두방송을 듣고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귀가하던 중, 복부에 총탄을 맞아 숨진 상태로 다시 기독병원으로 이송됐다.



정조준 사격 희생자만 벌써 250여 명

미얀마 태권도대회 우승자였던 ‘치알 신’(19)은 지난 3일 만델라이시에서 열린 시위 도중 머리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치알 신은 ‘모든 것이 잘 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가슴에는 A형이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는 사고 전에 페이스북에 “나는 (혈액형이) A형이다. 만약 내가 총을 맞는다면 각막과 다른 장기를 기증해 달라”고 적었다. 무자비한 살상과 죽음의 공포도 사랑을 실천한 소녀의 의지를 막지는 못했다.

학살과 탄압에 굴하지 않는 그네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용기가 오히려 우리를 두렵게 한다. 민중의 피와 희생 없이 세워진 민주주의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희생자가 너무나 많고 또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시민들은 ‘광주 5·18’이 폭도들의 난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로 부활한 것처럼 미얀마 또한 그렇게 비상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광주 5·18에서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40년 전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외부와 단절된 채 겪어야 했던 그 어둡고 두려웠던 절망의 날들. 미얀마에서는 지금도 80년 광주 5·18이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미얀마에 대한 광주의 연대 정신과 그 실천이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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