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우석대 석좌교수] 금호(錦湖) 임형수의 억울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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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우석대 석좌교수] 금호(錦湖) 임형수의 억울한 죽음
2021년 02월 01일(월) 08:00
조선왕조 5백 년, 참으로 많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죽어 간 선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대학자, 대정치가, 대문호들이 부당한 권력의 농단으로 무고와 모함에 걸려 생명을 잃었다. 이런 사건들은 바로 선비들이 당한 환란이어서 ‘사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화로는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 등이 있다.

38세의 당당한 대사헌(요즘 검찰총장)으로 대학자·대정치가이던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적폐를 청산하고 요순시대와 같은 나라를 만들려다가 기득권 세력의 참담한 모함으로 유배지 전라도 능주에서 사약을 마시고 목숨을 버려야 했다. 기묘년의 일이어서 이를 기묘사화라 부른다. 이 사화에는 조광조의 동지이거나 제자들이던 최산두·유성춘·윤구(호남3걸) 등 팔팔 날던 전라도 선비들, 문과에 급제하여 한창 벼슬을 시작한 그들 또한 무참히 짓밟혀 전라도의 한으로 남았으며 저항심의 씨앗이 되었다.

1545년의 을사사화는 대윤·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불의의 소윤 세력들이 대윤 세력을 제거하던 싸움인데, 금호 임형수(1504-1547)와 미암 유희춘 등 전라도 선비들이 무수히 당했던 환란이었다. 하서 김인후 또한 그런 막된 세상에서 벼슬할 수 없다면서 분노를 품고 낙향하여 전라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자리하였다.

불의의 권력 집단은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유희춘은 19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임형수는 끝내 사약을 받고 목숨을 버려야 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사약을 받던 그때 임형수는 우리 나이로 겨우 34세. 이 얼마나 억울한 죽음인가.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소재 노수신 등 당대의 인물들이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가장 뛰어난 직신(直臣)이요 가장 뛰어난 학자”라 했던 임형수는 그렇게 억울한 죽음으로 대성한 학자·정치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계묘년(1543)에 당대의 학자와 문인들이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아 호당(湖堂)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정책을 논했던 기록이 있다. 이른바 ‘계묘호당수계록’(癸卯湖堂修설錄)이라는 기록인데, 13명의 명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퇴계 이황, 상덕재 정유길, 추파 송기수, 국간 윤현 등 뒷날 모두 고관대작에 오르고 혁혁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분들이 많다. 거기에 들어간 호남 사람은 세 분(나세찬·임형수·김인후)인데 그중 두 분은 을사사화와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면하지 못했거나 하향하여 일생을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말았다. 이 하나의 사실에서도, 호남인들의 분노와 의리 정신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사화에 걸려 정계에서 은퇴한 삶, 끝내 사약을 받고 죽어가야 했던 억울함, 목숨이야 건졌지만 유배살이로 억울함은 풀 수 없었던 생활. 이런 일을 가장 많이 당했던 사람들이 호남사람이었다. 글만 잘하고 시만 잘 짓는 선비가 아니라 활쏘기 말타기에도 능했던 호걸 선비 임형수는 비록 뒷날 사면 복권은 되었다. 하지만 서른넷의 나이에 사약을 마실 때의 분노를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는가.

이와 관련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사약을 마시던 순간 곁에 있었던 열 살 된 아들에게 “너는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라고 훈계하더니, 다시 고쳐서 “글을 배우더라도 절대로 과거시험에 응하지는 말아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한창 벼슬을 시작할 무렵에 제주목사로 쫓겨 갔다가, 마침내 벽서사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는데 그 일로 모함을 받아 사약이 내려졌으니, 얼마나 억울했으면 아들에게 글을 배우지 말라는 훈계를 했겠는가.

사화에는 전혀 관계없이 벼슬보다는 학문에 더 진력해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우뚝 솟은 퇴계는 친구 임형수의 죽음 소식을 듣더니, “너무 억울하구려! 너무 억울하구려! 언제쯤 그와 대면하여 학문을 논할 기회가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임형수는 평택 임씨로 나주 출신이다. 대대로 나주의 송현(松峴)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천재의 기질로 학문과 시문에 뛰어났다. 비록 낮은 벼슬인 홍문관 응교·전한 등 문한(文翰)의 지위에 있었으나 중종대왕이 승하하자 능지(陵誌)를 지으라는 어명을 받고 글을 지었으니 국중의 최고 문장가 대접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친구 사이로 가장 가까이 지냈던 퇴계는 세상에서 유명해졌는데, 일찍 죽어 대성하지 못한 임형수는 그래서 더욱 억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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