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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함께 건너왔던, 여전히 살아 숨쉬는 ‘푸른 청춘’
<9> 광명시 기형도 문학관
2020년 10월 12일(월) 00:00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한 기형도 문학관에는 기형도 시인의 삶과 문학적 혼이 응결돼 있다.
기형도 시인(1960~1989). 기형도하면 ‘운명’, ‘요절’, ‘천재’, ‘가난’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시적인 삶, 극적인 삶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짧은 삶이었지만 불꽃같은 예술혼을 불살랐던, 고전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주인공이다.

그가 살아있었으면 올해로 만 60세가 된다. 아마도 요절하지 않았다면 기형도로 인해 한국 현대시문학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시가 지닌 진정성과 깊이 그리고 아름다움, 거친 듯 부드럽고 압축적이면서도 유연한 시풍은 여타 시인과는 결이 다른 아우라를 발한다.

1989년 5월 30일 발행된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이 있다. 이 시집이 문청들에게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이 땅의 문학적 풍토에서 어떻게 저 같은 시들을 쓸 수 있었는가”하는 경이로움이었다. 바로 시인 기형도의 유고시집이다.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시가 지닌 경이로움은,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형도. 부친 기우민 씨와 모친 장옥순 씨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다. 그러나 얼마 후 경기도 광명으로 이사를 한다. 그의 부친은 황해도 벽성군 출신으로 6·25때 연평도로 이주했으며 이후 섬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고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면서 가난은 늘 그를 따랐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그의 문학적 삶과 시혼이 집결된 문학관을 찾아나서는 길,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광명 KTX역 인근에 자리한 터라 문학관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가끔 서울과 수도권 일이 있어 KTX 열차를 타고 갈 때면, 정차했던 광명역. 기형도 시인이 광명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명징한 사실로 다가온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열차 차창으로 기형도 시인의 단편적인 사실들이 흘러간다. 기자 출신 시인, 마지막 숨을 거둔 영화 극장 등… 1시간 30분이면 닿는 바로 지척에 기형도 흔적이 남아 있었구나. 물리적인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었을지 모른다. 문학기자를 하면서 한번쯤 꼭 오고 싶었던 곳이 기형도문학관이었다.

기형도와 관련된 다양한 문학잡지들.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한 이곳은 모던하면서도 아담하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내부 콘텐츠가 타 문학관과 차별화돼 있다. 작품과 시인의 삶을 모티브로 상상력을 구현한 공간들은 마치 시인의 성정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잔잔한 여운과 깊은 상상력 그러면서 따스한 인간미가 배어 있다.

문학관이 건립되기까지는 문단선후배, 출판계, 유족, 광명시 등 각계의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2015년 광명시는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을 짓기로 한다. 당시 유족을 비롯해 시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이 기형도를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한다. 이를 토대로 2017년 11월 문학관이 건립되기에 이른다. 이후 문학관은 2018년 3월 문학진흥법 기반 경기도 제1호 공립문학관으로 등록됐으며 현재는 광명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문학관이 들어서기 전에도 고인을 추모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다. 기념사업회의 ‘시길밟기’, 광명문화원의 ‘추모시 낭송회’, 광명시중앙도서관의 ‘기형도 특별 코너’ 설치와 광명시민회관의 ‘추모공연’ 등이 이어져 왔다는 게 이윤림 학예사의 설명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시인이 살았던 옛 집.
이어지는 이윤림 학예사의 설명.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에 입학해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꾸준히 활동을 했어요.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문단 진출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면서였구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89년 3월 6일 심야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담당의사 소견이었다고 해요.”

지금은 너무도 고전적인 말이 돼 버린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머리를 스친다. 아마도 시인 기형도를 두고 이르는 말인 듯하다. 기형도의 빛나는 시와 맑고 순수한 영혼은 세파에 찌들고 지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인 극장은 대표적인 공공의 장소이면서 철저히 개별화된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장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현실 속에서 철저히 유폐된 개인의 실존을 기형도 시인의 죽음은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우대식,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새움, 2020, 68쪽)

문학관에는 삶의 이력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중앙일보 발령통지서, 입영통지서, 라디오와 이어폰, 만년필과 케이스, 카세트테이프 10종, 탁상시계 등은 시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가운네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상패, 연세대 윤동주문학상 상패는 본질적인 시인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문학관을 나와 바로 옆으로 이어진 기형도 문화공원으로 향한다. 아담하고 깨끗한 동산이 펼쳐진다. 어디선가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아련하게 떠오르는 작품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