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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정호, 동생 정이와 함께 송나라 도학 대표 인물
2020년 03월 31일(화) 00:00
<초당대총장>
정호(程顥, 1032~1085)의 호는 명도(明道)로 허난성 뤄양 출신이다. 동생 정이와 함께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부친 정향이 강서성 남안의 판관으로 재직때 주돈이를 만났는데 그의 비상한 재주와 기상에 감동해 두 아들을 보내 배우도록 했다. 주돈이는 이정(二程)에게 늘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탐구케 하였다. 1057년 진사시에 합격해 주로 지방관으로 활약했다. 1070년 여공저의 추천으로 중앙에 진출했다. 신종 즉위 후 저작좌랑이 되었으나 재상 왕안석과 갈등을 빚어 다시 지방관으로 내려갔다. 신종에게 논십사차자(論十事箚子)를 올려 국가의 10가지 중대사를 건의하였다. 1085년 철종 즉위 후 재상으로 복귀한 사마광이 종정사승으로 삼았으나 병사했다.

주자는 맹자 이후 끊어진 도를 이정이 다시 이었다고 평가했다. 공자-증자-자사-맹자의 도통이 이정을 걸쳐 주자에게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정호는 심학(心學) 일파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심학은 육구연이 계승하여 왕수인이 완성하였다. 우주의 근본 원리를 이(理)로 정의하고 사람은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해 순응해야 한다는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했다. 정호는 이를 일종의 자연적 추세로 보았다. 한 사물의 리는 그 사물의 자연적 추세이고, 천지만물의 리는 천지만물의 자연적 추세다. 철학자 펑유란의 해석에 따르면 인(仁)은 만물과 혼연하여 같은 몸이 되었다. 의·예·지·신 모두 인이다. 만물과 일체라는 도리를 이해하고 이것을 마음속에 보존하고 성실하고 조심스럽게(誠敬) 이 도리를 실천해야 한다. 그의 사상은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사서 중에서 대학(大學)을 중시했다. 대학을 공자의 유서(遺書)로 규정해 이 책에 따라서 학문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058년 섬서성 후셴현에 근무할 때의 일화다. 부패한 세리(稅吏)가 있었는데 살인도 할 수 있다고 호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그가 부임하자 불안해진 세리는 은근히 다음과 같이 협박하였다. “내가 관의 재물을 도둑질했는데 부임한 관리가 그걸 밝혀내 궁지에 몰리면 필시 살인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런 말까지 한단 말이오. 귀하께서 국록을 먹는데 어찌 도둑질을 할 수 있겠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어김없이 사형에 처해야 될 것이오. 어찌 감히 살인을 할 수 있겠소.” 세리는 겁을 먹고 스스로 도용한 관의 재물을 상환하였다.

1063년 강녕부 상원현 주부로 부임했다. 어느 여름철 저수지 제방이 무너졌다. 규정대로 하면 현에서 강녕부로 보고하고 강녕부는 전운사에 품의한 연후 필요한 인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한달 이상 소요된다. 선생은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벼들이 말라 죽게 되고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백성을 구하려다 죄를 얻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재량으로 둑을 막은 덕에 큰 풍년이 들었다.

영종 4년(1067) 진청현령이 되었다. 백성들이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배우게 하였다.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백성들이 서로 돕도록 하였다. 질병자들도 모두 봉양하였다. 마을에 학교를 세웠고 시간이 나면 촌로들을 불러 논의하였다. 학생들을 정성껏 가르쳐 임기를 마치고 떠난지 10년 만에 유학자가 수백명이나 배출되었다. 진청현은 인구가 만호나 되는데 3년동안 강도도 없고 싸우다 죽은 자도 없었다. 백성을 지극히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을 뜻하는 시민여상(視民如傷)을 좌우명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었다.

신종때 재상 왕안석과 같이 일할 때 일화다. 왕안석이 다른 사람에게 매우 화를 내자 조용히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한 집안 내의 사사로운 의론이 아닙니다. 공은 기운을 화평히 하시기 바랍니다.” 왕안석이 부끄러워하였다. 한번은 둘이 생각이 다르자 왕안석이 “공의 학문은 큰 벽과 같소.”라고 말했다. 이에 “재상의 학문은 바람을 잡는 듯합니다.”고 답하였다. 왕안석은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내쳤지만 그만은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