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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사임당의 예술 재능 어디서 왔나?
2019년 11월 14일(목) 04:50
신사임당은 우리 역사를 장식하는 대표 인물이지만 이 땅에 와서 머문 시간은 50년도 채 안되었다.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후 500년이 다 되도록 계속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동안 나올 이야기 다 나왔을 테고, 자료 또한 한계가 있을 터인즉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임당과의 연결성이 전혀 없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자료지만 어쩌다 깊게 보고 넓게 보니 거기 또 새로운 이야기감이 들어있는 것이다.

신사임당은 과거 한 시기를 살았던 닫힌 존재이지만, 그녀의 의미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따라 항상 열려 있는 존재이다. 사임당은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사임당이 별세한 그해 16세의 이이는 어머니 행장(行狀)을 짓는다.

이에 의하면 사임당은 평소에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걸 매우 즐겼고,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본으로 삼아 산수도를 그렸는데, 매우 정밀했다. 특히 포도를 그리면 모두 진짜 같다고들 했는데, 병풍과 족자의 형태로 세상에 많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행장> 마지막 부분에 40여 한자로 구성된, 이러한 그림 관련 이야기는 시대의 관심에 따라 약화되기도 하고 강조되기도 한다.

어쨌든 사임당은 아들 율곡과는 별개로 살아 있을 때부터 산수도 명인으로 이름이 났다.

세종대에 안견이 있었다면 중종·명종대는 사임당이었다. 글씨와 시문으로 중국에도 그 이름을 날리던 소세양은 사임당의 산수도 두 편에 대한 글들에서 “신묘한 붓이 하늘 조화를 뺏었다”고 했고, 그 외도 여러 사람들이 사임당 그림 솜씨를 극찬했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후천적인 노력으로만 될 일이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어디서 왔을까?

알다시피 신사임당은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고, 혼인 후에도 이곳 친정에 머물며 자녀들을 낳아 길렀다. 친정이라 함은 친가 평산 신씨의 세거지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버지 신명화는 강릉과 큰 연고가 없던 서울 사람으로 강릉에 장가를 와 딸 다섯을 낳아 길렀다.

즉 사임당의 친정 강릉은 그녀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면 다시 사임당의 외가라면 어머니 용인 이씨의 세거지인가? 아니었다. 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 역시 처가 최씨의 세거지 강릉으로 장가 온 사람이었다.

그는 강릉의 명문 사족 최응현(1428~1507)의 딸과 혼인하면서 강릉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최응현의 딸의 딸의 딸이 바로 사임당이다. 훗날 율곡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조모의 외조부인 최응현의 신도비명을 그 후손의 자격으로 짓게 된다. 사실 신사임당이나 이이의 경제적 기반은 강릉 최씨에 연유한 바 크다.

여기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감지되는데, 바로 최응현의 손자 최수성(1487~1521)이다. 최수성은 문장 뿐 아니라 시·서·화·음률에 기재(奇才)를 발휘한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최수성을 가리켜 “시는 이백과 두보에 못지않고 문장은 유종원과 한유에 못지않다. 필법은 왕희지에 견줄 만하고 화법은 고개지에 뒤지지 않는다”고들 했다. 사절(四絶)이라 일컬어진 최수성, 그의 작품은 전해오지 않지만 사임당의 재능과 학습에 깊이 관련되었을 것이다. 생존 시기나 거주 공간을 볼 때 사임당은 당숙 최수성에게 직접 배웠을 가능성도 짙다. 그에게 사임당은 고모의 딸이 낳은 딸로 촌수로는 5촌 조카이다. 혈연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사임당의 일곱 자녀 중에 맏딸 매창과 3남 이이, 4남 이우가 학문 또는 예술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이우는 최수성처럼 시서화악(詩書畵樂)에 다 능했다. 또 이우의 딸이자 사임당의 손녀인 벽오부인 이씨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혈연 집단 내부에서 직간접적인 재능의 전수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자료만 모아도 예술 관련 인재들이 줄줄이 확인되는데, 주변인들의 정보나 자료가 더 보태진다면 사임당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율곡연구원 소식지’ 제73호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