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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15> 1970년대 중반 하이틴영화
진짜진짜 얄개스럽게…검열 피하기
폭력영화 기준 발표 등
유신정부, 검열 또 검열
검열 피한 하이틴 영화
134편 중 25편 제작
임예진·이덕화 콤비
‘진짜진짜 시리즈’부터
2019년 08월 07일(수) 04:50
























1975년 8월 30일, 유신 정부는 ‘폭력영화의 제작 및 수입 불허기준’을 발표했다. 혹시라도 국민들이 폭력영화의 영향을 받아 시위라도 벌일지 모른다는 근심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영화검열 역시 영화의 주제, 스토리, 대사에까지 낱낱이 손길이 뻗쳤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체제비판이 보이면 대사 한마디는 물론 장면 전체가 잘려나가는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영화는 까다로운 검열을 피하기 위해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하이틴영화들을 유행시키게 된다. 바로 임예진, 이덕화 콤비가 출연한 ‘진짜 진짜 시리즈’와 이승현, 강주희, 김정훈, 진유영 등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얄개 시리즈’가 바로 그 영화들이다.

‘여고졸업반’(1975, 김응천)으로 불씨를 당긴 하이틴영화는 1976년과 1977년, 2년 동안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1976년에는 134편의 한국영화 중 25편이 하이틴영화였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 선두에는 ‘진짜 진짜 잊지마’(1976, 문여송)가 있었다. 영수(이덕화)와 정아(임예진)는 열차 통학을 하는 고교생들이다. 두 사람은 이성교제를 엄격히 규제하는 학교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키워가고 장래까지 약속한다.

그러나 정아가 악성폐렴으로 죽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당시 유행하던 ‘러브 스토리’나 ‘라스트 콘서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소년 관객들은 이 영화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신들과 같은 또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들을 염원했다.

그렇게 해서 같은 해 ‘진짜 진짜 미안해’가 만들어지게 된다. 역시 이덕화와 임예진이 주연이었다. 이덕화는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으로 등장했고, 임예진은 이런 이덕화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문여송감독은 여세를 몰아 ‘진짜 진짜 좋아해’(1977)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덕화 대신에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한 김현의 매력이 부족했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대신, 혜은이가 부른 주제가인 “진짜 진짜 좋아해”를 유산으로 남겼다.

‘진짜 진짜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임예진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임예진은 1976년 한 해 동안 ‘정말 꿈이 있다구’(1976, 문여송)와 ‘푸른 교실’(1976, 김응천)등 무려 열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CF모델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등 당시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진짜 진짜 시리즈’를 견인한 스타가 임예진이라면, ‘얄개 시리즈’를 이끈 히어로는 이승현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귀여운 밤톨 머리를 한 고교생 이승현은 ‘고교 얄개’(1976, 석래명)로 열풍을 일으키며, 하이틴영화의 인기가 사그라질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고교 얄개’는 조흔파가 ‘학원’에 연재했던 소설 ‘얄개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영화의 초중반은 고고생 얄개의 좌충우돌 이야기로 코믹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러나 후반부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선회한다. 호철(김정훈)의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수(이승현)가 친구를 돕는 착한 학생이 된다는 결말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고교 얄개’는 한국영화사에서 10대 관객층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본격적인 작품이었다는 점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같은 시기 흥행에 성공한 ‘진짜 진짜 잊지마’가 동원한 6만여 명(서울 단관극장 개봉 기준)과 비교한다면, 26만을 동원한 ‘고교 얄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교 얄개’가 성공하자 곧바로 똑같은 출연진이 그대로 등장하는 ‘속 고교 얄개-얄개행진곡’(1977, 석래명)이 만들어졌고, 감독이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고교우량아’(1977, 김응천)가 만들어진다. 이들 영화 속에는 이승현 말고도 강주희, 김정훈, 진유영이 맹활약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후에 만들어진 하이틴영화들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들 영화에서 감지되는 것은, 교훈적인 메시지를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청소년으로 성장해 산업사회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하이틴영화라고는 하지만 유신 정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 시기 영화들의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영화들은 현재의 눈으로 보면, 70년대의 혼란스런 사회에서 이상적인 학교를 꿈꾸고 있는 판타지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말죽거리 잔혹사’(2004, 유하)에서 유하감독이 당시 고교시절을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극적으로 구성한 학교는, 얄개시리즈에서 보여 지는 학교와는 사뭇 다른 살풍경의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시기 하이틴 영화 속의 세계는, 밝고 명랑하며 효도와 우정이 가득한 세상으로 포장되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과 정형화된 묘사는 관객들의 시선을 오래 동안 붙들어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1977년 말부터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한 하이틴영화의 붐은, 1978년 김응천, 문여송, 석래명 감독이 에피소드 하나씩을 연출한 옴니버스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를 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3인의 감독은 하이틴영화 전문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유행시킨 장르를 부활시키고자 의기투합했으나, 그 부활을 보지 못하고 고교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옴니버스영화에서는 얄개시리즈의 스타들이 총출동해 부활의 날갯짓에 힘을 보태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하이틴영화의 시대는 저물고, 감독들은 성인 관객을 겨냥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하이틴스타들 역시 성인연기자로 변신을 꾀해야 했다.

하이틴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그것은 소비대중으로서의 청소년을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10대 관객들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소위 ‘베이비 붐’ 세대들로서 부모님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영화 한 편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하이틴영화는, 소비대중으로 부상한 청소년들을 극장으로 유입시키며 청소년들이 문화상품의 구매자가 될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했던 것이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