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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곰곰이 생각’ 하자
마음이 과학논리 앞서버린 현재
한 나라 두 국민 된 지 이미 오래
건강한 논쟁 사라지고
무시·억지·무논리만 남아
논리를 편의대로 해석
2019년 07월 30일(화) 04:50
송필용 작 ‘무제’
광주일보를 붓 머리로 하여 전북일보, 경인일보, 매일신문 등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나서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비난도 없지 않았다. 비난을 받을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생각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아야 할 생각이 개수가 준 나머지 몇 개의 생각으로 뭉쳐서 활력을 잃는 것이 더 위험하다.

문제는 지지나 비난이 어느 높이에서 일어나는가가 중요하다. 지지가 되었건 비난이 되었건, ‘곰곰이 생각’하고 하는 것과 그러지 않고 감(감각과 감성)으로만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생각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있다. 거기서는 지적 개방성이 최소한이나마 작동한다. 이리하여 싸움판 같은 논쟁이라도, 그것이 끝나는 곳에는 협치도 자라나고 합의도 피어나서 사회를 앞으로 미는 전진의 기운이 생겨난다.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보장되지 않은 정도의 수준에서라면, 논쟁은 그저 비난전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한 치의 전진도 없다. 그저 제자리를 뱅뱅 돌거나 과거로 퇴행한다. 내가 보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감각과 감성의 작동 기재에 갇혀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허용되지 않는 매우 극단적인 양분 상태이다. 한 나라 두 국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어느 쪽에서나 ‘내로남불’을 대놓고 하고 얼굴색도 바뀌지 않는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에는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이 결사적이다.

이젠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장수하는 비결이 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들어주는 경우가 아주 귀하다. 대개는 어떤 주장을 들으면서 우선 자기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결정하고, 거기서 출발한다. ‘맘’이 과학과 논리를 앞선다. 맘에 들면 맘에 들게 논리를 만들고, 맘에 안 들면 맘에 안 들게 논리를 만든다. 그러니 개념의 적용 범위를 무시하거나, 억지스럽거나, 논리적이지 않거나, 인신 공격적이거나, 프레임을 쉽게 씌운다. 국가주의니 획일주의니 패권주의니 하는 등등의 ‘주의’에 쉽게 갇힌다.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많은 철학이나 정치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욱 심하다. 지적인 훈련이 되어 있으면, 논리로 감각을 지배하지만, 지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는 말은, 논리를 편의대로 만든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적 주장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심하게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지적 독립성이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정치의 늪을 피하지 못한다. 고도로 지적 훈련을 받은 증명서를 가진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치가 모든 지적 활력을 다 빨아드린 후 소진 시켜 버리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정치라는 블랙홀의 흡인력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가가 얼마나 높은 강도로 지적 훈련을 받았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각과 감성을 이겨내라는 뜻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감성이 배제된(완벽한 배제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나 한일관계에서나 건강한 논쟁을 할 토양은 사라졌다. 논쟁을 통해 무슨 조그마한 소득이나마 산출할 토양이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면에서는 경제지표가 하락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이다. 극단적인 이전투구 판에 있으면서도 죽기 전에 바늘 끝만 한 아름다움이나마 거두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면 이 정도까지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내 나라가 나는 너무 슬프고 무섭다.

앞에서 ‘지적 훈련’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학벌 좋고 가방끈이 긴 사람들끼리의 말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지적 태도라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가장 효율적인 한 방식일 뿐이다. 세계를 지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접촉한다. 좁고 얕게 접촉하는 사람은 넓고 깊게 접촉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기고 지는 승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종합한 인생 전체에서의 승리 여부를 말한다. 지구는 평평한가, 둥근가? 배운 것을 즉각적으로 내뱉으며 둥글다고 아주 쉽게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하지도 않은 것을 자신 있게 말하기란 적잖이 조심스럽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전혀 경험되지 않는다. 감각과 본능으로 보면 지구는 평평하기만 하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봐야 둥글다. 지적이라는 것은 지식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보는 능력을 발휘하는지의 여부이다. 지구를 평평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세계를 접촉하는 범위는 좁고 얕을 수밖에 없다.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져 봐서 지구를 둥근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를 넓고 깊게 접촉한다. 삶의 효율성이 누구에게 더 있을지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이렇게 보면, 지적 태도는 우선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는 태도이다. 감각과 본능을 극복한다는 말은 감각과 본능을 소멸시키거나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 능력으로 감각과 본능을 정련시킨다는 말이다. 지적이면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지면서 반응하기 때문에 덜 감성적이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정련되지 않은 감각이 그대로 튀어나와 훨씬 더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다. 지적이면 생각을 하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학력이 아무리 높아도 지식의 양만 넘쳐나고 곰곰이 따지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학력이 낮거나 지식의 양이 적더라도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지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세계와 반응하는 기술이자 태도이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커지는 데도 인간은 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은가? 생각이라는 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수고이다. 힘이 든다. 감각과 감성은 정신적인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극에 맡겨 본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 된다. 특정한 이념에 갇혀도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 이념만 기준으로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념가들이 더 감성적인 이유이다. 분명한 것은 ‘이념’이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이다. 이념을 강하게 소유하면,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과거를 지키거나, 거기에 자발적으로 갇힌다는 문제가 있다. ‘이념적이다’, ‘과거에 갇혔다’, ‘생각이 없다’, ‘감성적이다’라는 표현들은 서로 매우 가깝게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만일 권력을 갖게 되면 쉽게 자기 확신에 빠진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가 만든 진실에 자기가 도취 되어 역사에 철저한 태도로 헌신한다는 느낌을 스스로 제조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이념을 본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수고를 하지 못하고, 이념으로(그것이 낡은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제어하려는 무모함을 행한다.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승리의 길을 포기하고 ‘자아 도취에 빠져 몽환적 정치’를 하게 되는 노정은 이와 같다. ‘일상’과 ‘현실’이 아무리 피폐해져도 오히려 그 피폐함을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로 간주한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중요하다. 감각과 감성에 의존하는 태도를 갖느냐 지적인 태도를 갖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의 근대 역사에는 동학 혁명이라는 불꽃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는 동학의 정신을 잘 살피고 더욱 계발해야 한다. 동학도 없었으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여기서 우선 김태유 교수의 “패권의 비밀; 4차 산업혁명 시대, 부국의 길”이라는 제목을 단 유투브 영상을 소개해야겠다. 모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김태유 교수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 의해 3만명 사살될 때 일본군은 한 명 죽는다. 엄청난 격차다. 무기가 달랐다. 일본군은 전설의 소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자신들의 신체에 맞게 개선한 무라다 소총을 썼고, 우리는 여전히 화승총을 들었다. 무라다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장전하며 1분간 15발을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800m였다. 반면 화승총은 2∼3분 동안 선 채로 1발을 장전하여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m였다. 이런 화승총에 죽창을 곁들인 무력으로는 아무리 큰 결기로 뭉쳤다 하더라도 무라다 소총을 든 적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산업화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무라다 소총과 화승총의 차이는 산업화의 차이를 상징한다. 그럼 왜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고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세계에 반응하는 ‘태도’가 좌우한다. 무엇을 ‘제작한다’ 혹은 ‘개선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편함과 문제를 느껴서 ‘그 다음’을 ‘알려고’ 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발현된 것들이다.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를 가지면 곰곰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감각과 본능이나 감성을 표하는 것으로 자기 태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반면에 ‘그 다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면, 불편이나 문제를 발견한 후 그것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한다. 이것이 지적인 태도이다. 스나이더 소총을 무라다 소총으로 개선했다는 것은 일단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여 지적인 태도로 문제를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있던 화승총을 별 개선 없이 계속 썼다는 것은 우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우리보다 먼저 혹은 더 철저히 발휘했던 일본은 우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았고,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했던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치욕을 살았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알려고 하는 태도는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욕망이다. 그것이 바로 지적인 태도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다. ‘알려고 하면’(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 것이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약 20여 년 전, 지금 일본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러 저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의 성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었다. ‘네이버 열린논단’에서 한 미야지마 교수의 강연 내용에 의하면, 1872년에서 1876년 사이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출간한 ‘학문의 권장’이라는 계몽서가 300만부나 팔렸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500만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금 과장하여 당시 일본인 10명 가운데 한 명은 이 책을 읽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는 평가는 뒤로 하고, 그의 시대에 그가 300만의 독서 인구를 가졌다는 그 사실이 부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독서는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아주 잘 된 사람들이 남긴 결과(그것이 책이다)를 접촉하여 자신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다. 우리는 ‘무라다 소총’과 300만 독서 인구의 존재가 같은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300만 독서 인구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따로 존재하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300만 독서 인구를 가진 당시 일본 사회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토양이다.

우리가 일본에 패배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 해야 지식이 나오고, 또 거기서 산업이 나오고, 국력이 커지는 이치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곰곰이 생각’하는 지루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미덕이 사라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생각하는 수고를 포기한 감성의 배설과 감각적 판단이 요즘은 난무한다. 이미 소지한 각자의 신념을 지키는 일로만 세월을 보낸 지 이미 수십 년이다. 이제는 프레임 씌우기가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빨갱이라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받은 적이 있던 사람들은 위치가 바뀌자 친일파라는 프레임 씌우기에 바쁘다. 이런 토양에서 건설적인 정치와 외교와 정책이 실현될 수는 없다. 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각과 감성보다는 숙고와 사실에 기대는 사람이다.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다음 원고는 8월27일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