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머리 고지에 올라 찢겨진 산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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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머리 고지에서 만난 영웅들
“포탄이 멈추고 밤의 적막이 찾아오면 어머니의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서글픈 무명용사들의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노라면 오랜 세월의 더께에도 여전히 눈물이 난다. 그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6월 호국(護國) 보훈(報勳)의 달에, 말없이 스러져간 이름 없는 영웅들을 생각한다.
최근 관훈클럽 답사단의 일원으로, 70년 가까이 민간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디엠지(DMZ:비무장지대)를 다녀왔다. 하지만 이제 민간인들도 인터넷 두루누비(durunubi.kr)에 신청하면 추첨을 통해 방문할 수 있다는데, 그곳에서는 지금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먼 옛날 궁예가 도읍으로 정했던 ‘한반도의 배꼽’ 철원은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두 시간 넘게 달려 읍내에 들어선다. “대민 지원 장병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땀방울로 무사히 모내기를 마쳤습니다” 길거리에 여기저기 내걸린 플래카드를 보며 군부대가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두루미평화마을에 내려 점심을 해결한다.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위치한,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모내기를 마친 들판에 노니는 두루미 몇 마리의 모습이 평화롭다.
타고 온 버스를 이곳에 두고 국방부에서 제공한 소형 방탄 차량으로 갈아탄다. 이제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다시 얼마쯤 달리니 검문소가 나온다. 아라비아숫자 ‘5’를 열쇠 모양으로 형상화한 5사단 ‘열쇠 부대’ 마크가 눈에 들어온다. 열쇠부대라! 통일의 문을 여는 ‘평화의 열쇠’인가? 제멋대로 부대 이름을 해석해 보는데, 또 한쪽에 걸린 살벌한 경고 문구가 으스스하다. ‘검문 불응 시 발포’. 비로소 접경지역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이윽고 방탄 차량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철조망 앞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통문(通門) 절차를 밟는데,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나니 사진 찍기는 아예 글렀다. 디엠지의 비경을 고스란히 담아 가리라던 부푼 꿈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20㎏이나 되는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방탄 철모를 머리에 이고 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남방한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로 들어선다.
비무장지대의 녹슨 철모
남방한계선은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동서로 155마일에 걸쳐 그어진 선(線)이다.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2㎞ 떨어져 동서로 그어진 선은 북방한계선이다. 이 두 선 사이의 4㎞가 바로 남북 사이의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다. 흔히 휴전선 하면 철조망을 떠올리지만 사실 휴전선 자체는 철책이 아닌 팻말로만 표시돼 있다. 텔레비전에 가끔 비치는 전방(前方)의 철책은 남방한계선이다.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는 지피(GP: Guard Post)가 있다. ‘전초’(前哨)라 부르는 감시초소다. 우리 일행이 들른 곳은 화살머리 고지 지피였다. 초소에 올라 보니 동쪽으로 공작새 능선,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포격으로 수목이 다 쓰러지고 헐벗은 산의 형상이 마치 누운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었다 한다.
화살머리 고지는 능선이 화살 머리를 닮아 6·25 때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휴전 협상이 시작되고, 서로 점령지를 넓히기 위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특히 백마고지는 주변에 철원 평야가 있는 요충지여서 수십 번 뺏고 빼앗겼다. 백마고지 탈환이 어렵게 되자 중공군은 서쪽으로 3㎞쯤 떨어진 화살머리 고지를 우회 공략했다. 이 바람에 51년 11월 국군 9사단, 52년 6월 미군 2사단, 52년 10월 프랑스 대대, 53년 6월 국군 2사단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다.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나무는커녕 들풀마저 자취를 감추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한다. 이때 국군 200여 명, 미군·프랑스군 300여 명, 중공군 3000여 명이 숨졌다. 이곳을 공동 유해 발굴 시범 지역으로 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프랑스군 추모비를 둘러보고 지피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유해 발굴 현장이 나온다. 지뢰 제거 지역은 노란 줄, 유해 발굴 작업장은 빨간 줄을 쳐 놨다. 능선 위를 오르니 막 발굴을 마친 한 평 남짓한 구덩이에 사람의 모습이 뚜렷한 유해가 드러나 있다. 한쪽에 놓인 녹슨 M1 소총은 총알이 장전된 채로 쇠 부분만 보인다. 두개골을 감싼 철모는 총알이 관통했다. 유해 좌우에서는 수류탄 안전고리와 안전핀이 나왔다. 이로써 어떤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름 모를 이 병사는 잠시 소총을 내려놓고, 언덕 아래 몰려오는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직후, 적의 총탄 세례를 받아 숨진 것이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군사분계선을 향해 도로가 뚫려 있다. 판문점과 고성에 이어 남북을 잇는 세 번째 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여기까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다만 한반도의 정중앙이라 해서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진 ‘남북도로 개설 기념비’를 뒤로 하고 하릴없이 돌아설 수밖에.
작년만 해도 지뢰 제거 작업을 같이 했던 남과 북은, 지난 2월까지 남북 공동유해발굴단 명단을 교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올 들어 몇 번의 전통문을 보냈어도 북쪽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모든 게 중단된 것이다. 백마고지 동쪽에 있는 궁예성터도 공동 복원하기로 했지만, 언제 이뤄질지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다.
다시 통문으로 돌아와 방탄조끼를 벗는데,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반드시 모시겠습니다’ 등의 플래카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하와이에서 받았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8년 전쯤이었던가. 미 국방부 소속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JAPAC:제이팩)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제이팩에는 실종 병사를 찾기 위한 최정예 군인 및 민간 연구자 4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군 실종자가 발생한 지역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간다. ‘그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다.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해 가족들의 품에 돌려주는 일은 전쟁터에서 스러진 젊은이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제이팩 건물 어딘가에 이런 구호가 걸려 있었음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조국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이홍재 주필 hong@kwangju.co.kr
“포탄이 멈추고 밤의 적막이 찾아오면 어머니의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서글픈 무명용사들의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노라면 오랜 세월의 더께에도 여전히 눈물이 난다. 그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6월 호국(護國) 보훈(報勳)의 달에, 말없이 스러져간 이름 없는 영웅들을 생각한다.
먼 옛날 궁예가 도읍으로 정했던 ‘한반도의 배꼽’ 철원은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두 시간 넘게 달려 읍내에 들어선다. “대민 지원 장병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땀방울로 무사히 모내기를 마쳤습니다” 길거리에 여기저기 내걸린 플래카드를 보며 군부대가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두루미평화마을에 내려 점심을 해결한다.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위치한,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모내기를 마친 들판에 노니는 두루미 몇 마리의 모습이 평화롭다.
이윽고 방탄 차량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철조망 앞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통문(通門) 절차를 밟는데,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나니 사진 찍기는 아예 글렀다. 디엠지의 비경을 고스란히 담아 가리라던 부푼 꿈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20㎏이나 되는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방탄 철모를 머리에 이고 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남방한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로 들어선다.
비무장지대의 녹슨 철모
남방한계선은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동서로 155마일에 걸쳐 그어진 선(線)이다.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2㎞ 떨어져 동서로 그어진 선은 북방한계선이다. 이 두 선 사이의 4㎞가 바로 남북 사이의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다. 흔히 휴전선 하면 철조망을 떠올리지만 사실 휴전선 자체는 철책이 아닌 팻말로만 표시돼 있다. 텔레비전에 가끔 비치는 전방(前方)의 철책은 남방한계선이다.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는 지피(GP: Guard Post)가 있다. ‘전초’(前哨)라 부르는 감시초소다. 우리 일행이 들른 곳은 화살머리 고지 지피였다. 초소에 올라 보니 동쪽으로 공작새 능선,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포격으로 수목이 다 쓰러지고 헐벗은 산의 형상이 마치 누운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었다 한다.
화살머리 고지는 능선이 화살 머리를 닮아 6·25 때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휴전 협상이 시작되고, 서로 점령지를 넓히기 위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특히 백마고지는 주변에 철원 평야가 있는 요충지여서 수십 번 뺏고 빼앗겼다. 백마고지 탈환이 어렵게 되자 중공군은 서쪽으로 3㎞쯤 떨어진 화살머리 고지를 우회 공략했다. 이 바람에 51년 11월 국군 9사단, 52년 6월 미군 2사단, 52년 10월 프랑스 대대, 53년 6월 국군 2사단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다.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나무는커녕 들풀마저 자취를 감추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한다. 이때 국군 200여 명, 미군·프랑스군 300여 명, 중공군 3000여 명이 숨졌다. 이곳을 공동 유해 발굴 시범 지역으로 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프랑스군 추모비를 둘러보고 지피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유해 발굴 현장이 나온다. 지뢰 제거 지역은 노란 줄, 유해 발굴 작업장은 빨간 줄을 쳐 놨다. 능선 위를 오르니 막 발굴을 마친 한 평 남짓한 구덩이에 사람의 모습이 뚜렷한 유해가 드러나 있다. 한쪽에 놓인 녹슨 M1 소총은 총알이 장전된 채로 쇠 부분만 보인다. 두개골을 감싼 철모는 총알이 관통했다. 유해 좌우에서는 수류탄 안전고리와 안전핀이 나왔다. 이로써 어떤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름 모를 이 병사는 잠시 소총을 내려놓고, 언덕 아래 몰려오는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직후, 적의 총탄 세례를 받아 숨진 것이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군사분계선을 향해 도로가 뚫려 있다. 판문점과 고성에 이어 남북을 잇는 세 번째 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여기까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다만 한반도의 정중앙이라 해서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진 ‘남북도로 개설 기념비’를 뒤로 하고 하릴없이 돌아설 수밖에.
작년만 해도 지뢰 제거 작업을 같이 했던 남과 북은, 지난 2월까지 남북 공동유해발굴단 명단을 교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올 들어 몇 번의 전통문을 보냈어도 북쪽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모든 게 중단된 것이다. 백마고지 동쪽에 있는 궁예성터도 공동 복원하기로 했지만, 언제 이뤄질지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다.
다시 통문으로 돌아와 방탄조끼를 벗는데,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반드시 모시겠습니다’ 등의 플래카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하와이에서 받았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8년 전쯤이었던가. 미 국방부 소속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JAPAC:제이팩)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제이팩에는 실종 병사를 찾기 위한 최정예 군인 및 민간 연구자 4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군 실종자가 발생한 지역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간다. ‘그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다.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해 가족들의 품에 돌려주는 일은 전쟁터에서 스러진 젊은이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제이팩 건물 어딘가에 이런 구호가 걸려 있었음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조국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이홍재 주필 h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