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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 인물 <36> 완도 허사겸 상
2018년 11월 26일(월) 14:53
1883년 완도(가리포진)에 부임한 첨사 이상돈의 탐학으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이상돈은 황장목을 베어 배를 만들어 팔았는데, 저 멀리 보이는 섬의 끝자락 부근에서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완도 고금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수군 통제영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장군은 왜적과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는데 완도를 비롯한 인근 지역민들의 희생 덕분에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다.

왜적의 침입에 맞섰던 완도인들의 애국 정신은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 특히 소안도에서만 수십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할 만큼 항일 운동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3·1만세운동이 완도에서도 일어났던 것만 봐도 이곳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지도와 소안도에 세워진 항일운동기념탑은 이를 방증한다.

예전에는 완도를 떠올리면 항상 섬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보물 같은 섬 말이다. 국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조시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윤선도(1587-1671)의 ‘장재도’(藏在島)라는 시가 있다.

“자그마한 섬이 산궐과 맞먹기에(小島當山闕·소도당산궐)/ 그 이름을 보물섬이라 지었다네(其名藏在曰·기명장재왈)/ 무슨 보물이 그 속에 있느냐고?(藏在問何財·장재문하재)/ 맑은 바람 그리고 밝은 달이지(淸風與明月·청풍여명월)”

그 보물은 단순히 ‘장재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완도라는 섬 전체로 확장할 수 있다. 늘 그렇지만 완도에 갈 때면 산수면 산수, 인물이면 인물, 역사면 역사 어느 면을 봐도 보물이 아닌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앞서 언급한 나라 사랑의 정신, 불의에 항거하는 의로움은 오늘의 완도를 일군 토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완도(莞島)라는 지명 어원이 ‘빙그레 웃을’ 완(莞) 자와 ‘섬’ 도(島)자를 쓰는 데서 보듯 외유내강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다. 한가로움과 여유, 미소와 인정 이면에 드리워진 강인하면서도 불굴한 의미가 다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완도에 갈 때면 그런 저런 이미지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가을 햇살이 좋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이번 완도행에서 꼭 들르고 싶은 그리고 소개하고 싶은 장소와 인물이 있다. 완도가 자랑하고 기억하는 이 사람은 불의에 맞섰던 가장 ‘완도스러운’ 인물이다. 허사겸(許士謙)이 바로 주인공이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낮추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는 의미가 실답게 다가온다. 자기 피알이 필수불가결한 시대에, 선비의 낮춤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허사겸의 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당인리 해변. 농민봉기가 발발하기 직전, 이상돈은 인근 소나무를 베어 이곳에서 배를 만들게 했다.





허사겸의 고향 마을.





“유적이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은 오랫동안 진행 중”이라는 정영래 완도문화원장의 말은 허사겸(1842~1884)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간 궁벽한 섬의 가난한 선비였기에 더더욱 그렇다.

허사겸은 1842년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에서 태어났다. 기록에는 그의 나이 42세 때 당인리 존위(尊位·이장)로 활동했다. 한미한 시골에서 무욕의 삶을 살았던 그가 갑자기 완도 가리포 농민항쟁의 선봉에 섰던 것은 그만큼 당시의 상황이 불의했음을 알 수 있다.

때는 1883년. 당시 허사겸을 비롯한 주민들은 ‘첨사’(僉使·고을 수령)와 하리(下吏·하급 벼슬아치)들의 탐학에 말로 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었다. 가리포진(加里浦鎭) 당인리 일대는 예로부터 선박을 만드는 나무들이 많이 자생하는 선(船) 재목의 보고였다.

1522년 진(鎭)이 설치돼 1894년(고종 31)에 폐진될 때까지 371년 동안 모두 226명의 첨사가 이곳을 거쳐 갔다. 첨사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이는 이영남 장군이다. 장보고연구회가 펴낸 ‘義士 許士謙(의사 허사겸)’에는 “이순신은 이영남을 가리포첨사로 추천하여 가리포지역의 방어를 책임지게 하고 수군의 확보와 군량을 공급하도록 하였으며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같이 전사한 구국의 애국전사”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1882년 (고종 19)에 부임한 이상돈(李相惇)은 가렴주구를 일삼던 부패한 관리였다. “금동이에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했던가. 말 그대로 이상돈 첨사 학정으로 주민들의 분노는 하늘에 치솟았다. 이상돈의 악행은 뻔히 드러날 거짓말과 탐학에서 비롯됐다.

“이상돈은 군선을 제조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황장목을 적잖이 베었습니다. 그런데 군선이 아닌 상선을 건조해 사리사욕을 채웠죠. 물론 주민들을 강제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요즘 말로 하면 인권 착취도 수시로 일어났어요.”

평생 배를 만들어왔다는 청해진선박연구소 마광남 소장의 설명이다. 그는 “이상돈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관속들과 야합을 했기 때문”이라며 “이상돈은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곤장으로 다스렸다”고 덧붙였다.

그 민초들의 원망과 눈물이 허사겸을 움직였다. 봉기에 직접적으로 불을 당긴 것은 폭풍으로 황장목이 유실되면서였다. 수탈에 능수능란해던 이상돈은 그 책임을 일을 맡은 이들에게 돌리고는 다시 배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다”던가.

참아왔던 분노가 마침내 노도처럼 일어났다. 맨 앞에 허사겸이 섰다. 이밖에 문사순, 최도일, 최여집, 채운집 등이 첨사와 하리들에 대한 응징을 결의한다. 1883년 11월 18일 주모자인 허사겸은 나팔소리를 신호로 군중을 모았다.

가리포진에서 남실대는 쪽빛 바다를 바라본다. 늦가을 햇볕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살은 곱기만 하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에서 그런 학정과 폐습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풍경이 전해오는 것은 마치 오래전 바다의 전설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 중기 문인인 장유(張維·1587~1638)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400여 년 전 가리포 해변이나 오늘의 해변, 그리고 100여년 전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을 당시의 해변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푸른 파도 사이로 긴 항적을 남기고 떠나는 이름 모를 배만이 그 답을 알 것도 같다.

“남쪽 바다 파도만 넘실대는데/ 외로운 성 비스듬히 걸려 있도다/ 돛단배 저 너머는 해가 뜨는 곳/ 한 잔 술 드노라니 신기루 나타나네/ 썰렁한 날 울리는 뿔피리 소리/ 저녁 운무(雲霧) 헤치며 전선(戰船) 돌아오누나/ 이제 훈련 마친 이층 배 갑판 위에/ 달빛 안고 쓰러져 자는 수병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

/완도=정은조 기자·전남주재총괄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