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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질서
2017년 11월 08일(수) 00:00
홍 행 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요즘 인문학이 대세다. 대학을 비롯한 기존의 정통 학계는 물론 기업과 지자체 혹은 백화점 등에서 개최하는 일반 문화 강좌에서조차 인문학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인문학은 문학·역사·법학·철학 등을 포괄한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딱딱한 ‘학문’이다. 남는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분야다. 그럼에도 요즘 사람들은 인문학 강의에 몰린다. 왜일까?

인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본 시스템과 가치관을 만들어 내는 학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터다. ‘문학’은 신화와 전설 등을 창조해 내고 퍼뜨림으로써 부족과 민족을 통합하고 네트워크화할 수 있는 세계관과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역사’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통해 지금의 사회를 더욱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한다. 또 ‘법학’은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운영될 수 있도록 각 구성원의 행동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갈망



그렇다면, 5∼6년 전만 해도 이 따분한 학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리 사회가 갑작스레 인문학 분야에 ‘필이 꽂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특정 집단이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고 일반 국민을 소외시켜 온 기존 사회 시스템의 정당성에 대한 의혹 그리고 불만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의혹과 불만이 새로운 대안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고, 사람들은 ‘사회 시스템’을 다루는 인문학을 통해 대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에 따르면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 같은 사회 시스템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s)다. 그는 베스트셀러 ‘사피엔스’(Sapiens)에서 “우리가 특정의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는 아주 많은 사람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한국 인문학 부흥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최진석 교수는 “개인 또는 국가가 지닌 ‘시선의 높이’가 나라의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시선의 높이’란 바로 ‘생각의 높이’다. 최 교수는 “생각이 높은 수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독립성을 확보할 때 가능해진다”라고 지적한다.



촛불 혁명과 ‘국민 주권’ 시대



최 교수의 주장처럼 개인이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외부 세계와 자신 간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업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는 기존 질서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상상의 질서일 뿐’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난 대선을 전후해 한국의 사회 시스템은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유지해 온 기존 시스템들이 급작스럽게 힘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기존 시스템은 일부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 그리고 자본 독점을 양대 축으로 삼아 작동해 왔다. 하지만 인문학으로 단련된 국민은 기존 시스템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사회 운영과 발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해졌고, 1000만 국민의 손에 들려 어둠을 환하게 밝힌 촛불은 ‘국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찾아냈다. 새 정부는 적폐 사정과 개혁 및 지방분권 등을 통해 새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역사는 통일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길게 보아서 역사는 통합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알아차렸든 아니든 우리 국민은 이미 새로운 시스템을 선택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어떤 미래로 이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지금은 옛 시스템과 새 시스템이 충돌하면서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물보라는 결국 사라질 테고 미래는 조만간 뚜렷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