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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13)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무소유 지향한 카잔차키스 … 그는 자유다
2017년 10월 12일(목) 00:00
크레타 수도 이라클리온. 카잔차키스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묘가 시내 남쪽 언덕에 있다.
크노소스 궁터에서 이라클리온까지는 6㎞. 크노소스 궁터는 청년시절의 카잔차키스에게 많은 영감과 자부심을 준 곳이었을 터이다. 훗날 카잔차키스는 소설 ‘크노소스 궁전(1940년)’을 발표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공터에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탔다. 크레타의 주도 이라클리온으로 가기 위해서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제국이 크레타를 지배할 때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부와 부친은 터키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889년에 터키 관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터키 당국은 살해사건을 빌미로 크레타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그의 가족은 탄압을 피해 낙소스 섬으로 이주한다. 이때 카잔차키스는 프랑스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크레타 사람들의 저항운동은 사도 바울이 크레타로 와서 선교하려고 했던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집단의지가 아닐까 싶다. 저항운동의 바탕은 크노소스 궁전으로 상징되는 미노아문명이라는 자부심일 것이고. 카잔차키스가 ‘크노소스 궁전’을 발표한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짐작된다.

청년 카잔차키스는 1902년에 아테네로 건너가 아테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재학 도중 소설 ‘뱀과 백합’을 발표했으며, 1907년에는 최초로 ‘동이 트면’이라는 희곡을 발표하여 작가상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이는 예민한 감수성과 저항의식이 강한 그에게 법학보다 문학이 더 적성에 맞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1907년에는 파리로 유학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철학을 공부한바, 이때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선언대로 이제는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는 니체가 그러했듯 불교에 심취하여 부처를 통해서도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담배연기는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 이 사라지는 연기의 나선은 푸른 열반의 행복한 종지(終止)를 찾아가는 생명이리라’, ‘부처가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부처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비어 있으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라는 식의 문장이 곳곳에 보인다.

1911년에는 고향 크레타로 돌아와 첫 번째 부인 갈라테아와 결혼했으며 1912년 발칸전쟁이 나자 자원입대한다. 전쟁의 승리로 그제야 크레타는 그리스로 편입된다. 1914년 이후부터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아프리카와 유럽 각국을 여행한다. 1917년에는 친구 알렉시스 조르바와 갈탄 광산을 찾기 위해 크레타 해안에서 머물렀고, 훗날 ‘그리스인 조르바(1947년)’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1925년에는 성격차이 때문에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28년에는 북유럽에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행한다. 루마니아 시인 파나이트 이스트라티와 동행했으며 그때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를 만난다. 또 이해에 크레타 에기나 섬으로 들어가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집필한다.

택시기사가 카잔차키스의 묘는 처음 가보는 모양이다. 이라클리온 시내로 들어서더니 한 동안 큰길을 달린다. 택시는 베니젤로스 광장을 지난다. 네 마리 사자의 입에서 물이 나오는 분수가 보인다. 사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다. 그렇다. 베네치아 양식의 건물도 있다. 크레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네치안 로지아가 그것이다.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 인에게 학살당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명명한 8월 25일의 거리도 있다. 우리나라 광주의 5· 18민주광장 같은 곳이다. 택시기사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묻고서야 방향을 바로잡는다. 카잔차키스의 묘는 이라클리온 시내남쪽 언덕에 있다고 한다. 택시는 골목을 이리저리 빠져나와 겨우 언덕길에 이른다.

다시 카잔차키스의 삶으로 돌아가 본다. 카잔차키스는 1945년에 엘레니 사미우(Eleni Samiou)와 재혼하여 안정을 되찾은 뒤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는데, 소설 ‘최후의 유혹(1951년)’과 ‘미할리스 대장(1953년)’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신성모독을 이유로 파문당할 만큼 그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1955년)’를 발표하는 등 그는 오직 자유와 평화를 찾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1957년에는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여행했으며 일본을 경유해 돌아오는 도중 백혈병 증세를 보여 급히 독일의 병원으로 옮겨진다. 이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나 다시 독감에 걸려 10월 26일 독일에서 사망하고 만다.

슈바이처 박사가 남긴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생명이라는 것’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아무튼 카잔차키스의 일생은 여행과 집필로 요약이 된다. 물론 한때 공산주의에 가담했으나 곧 회의를 느껴 탈퇴했으며 정치도 했으나 결국 문학으로 돌아와 안식을 찾는다. 정치나 종교보다 그 자신은 문학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카잔차키스의 묘’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가 드디어 카잔차키스의 묘와 조우한다. 그리스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카잔차키스의 묘치고는 초라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더 카잔차키스답다고 여긴다. 십자가는 흔한 나뭇가지로 돼 있어 지극히 소박하다. 비바람에 썩으면 무(無)로 돌아갈 것 같다. 묘비명은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심취했던 불경 구절에서 뽑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무소유를 지향하는 이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으리라. 존재지향적인 삶을 사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가 아닐까. 부처는 그것을 열반이라 불렀고 해탈이라 했다. 카잔차키스는 그것을 연역법의 문장 속에 자유라고 각색하고 있다.

카잔차키스의 묘 앞쪽에는 동지였던 두 번째 부인 엘리니의 묘가 있다. 부겐빌리아 붉은 꽃이 묘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바닷바람이 불자 종려나무 이파리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키 큰 여인의 머리채가 바람에 날리는 모양새다. 은사님도 카잔차키스의 묘에 와보고 싶었다고 하신다. 월간지 ‘문학사상’을 이어령 선생과 함께 창간할 때 특집부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희랍인 조르바’가 연재되는 동안 드문드문 읽으셨다고 한다.

나는 은사님에게 카잔차키스의 묘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자고 권한다. 또 다시 어느 날에나 이곳까지 올까 싶어서이다. 그러나 바닷바람이 이방인을 내쫓는 것처럼 회오리친다. 우리는 쫓기듯 언덕을 내려와 택시기사를 부른다. 마음씨 좋은 택시기사가 오는 동안 차가 막히지 않아 빨리 왔으므로 크레타의 바닷가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한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팁이라도 주고 싶어진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크레타 바다를 묘사한 구절이 많다. 카잔차키스가 바다를 희롱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적으로 변주하는 문장도 있다.

‘엄청난 갈증으로 으르렁대는 검푸른 바다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 멀리서 불어오는 뜨거운 남풍 리바스가 사막을 태웠다. 아침이면 바다에선 수박냄새가 났고 정오에는 안개에 덮인 채 조용했는데, 일렁거리는 파도는 흡사 덜 익은 젖가슴 같았다. 저녁이 되면 바다는 한숨을 쉬며 장밋빛이 되었다가 자줏빛, 포도줏빛, 그리고는 짙푸른 색깔로 변하는 것이었다.’

택시가 어느 마을로 들어서더니 일행을 바닷가에 내려준다. 기사는 나무 그늘로 들어가 담배를 피운다. 바다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다가서자, 카잔차키스의 말대로 여자의 젖가슴 같은 아주 작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또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흰 포말을 보니 바다가 배를 잡고 웃는 듯하다. 검은 돌무더기 끝에 아주 작은 교회가 하나 보인다.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정교회 신부들의 기도처 같다. 우리로 치면 산중암자 같은 곳이리라. 어느 나라를 가건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의 말이 실감난다. 교회건 사찰이건 대형, 최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성직자들이 꼭 봤으면 싶다.

/글·사진=정찬주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