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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밝힌노래]<13> 제주4.3항쟁과 잠들지 않는 남도
3만 민초의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 아! 통곡의 세월이여
2016년 12월 05일(월) 00:00
봉개동 토벌작전에 나선 군인들에게 쫓기던 중 총에 맞아 희생된 모녀를 추모하기 위한 모녀상 ‘비설’(飛雪).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남녘의 섬 제주도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에머랄드빛 바다·화산섬·용암동굴 등으로 유네스코 3관왕(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뒤켠엔 제주민들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감춰져 있다. 제주도민의 10%가 희생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4·3사건이다. 4·3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이나 스페인의 게르니카 비극과 비견될 정도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됐다. 그것도 국가권력에 의해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68년전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을 습격했다. 이들은 무장봉기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는 삐라의 구호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이라는 구호를 통해 남한민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4·3의 도화선은 1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 3월1일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대규모 3·1절 기념집회가 열렸다. 집회 끝 무렵 시위대가 관덕정을 지나간 뒤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채이자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순간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발포로 젖먹이를 안은 21살 여인과 15살 초등5학년 학생이 숨지는 등 6명이 희생됐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돼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3월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고, 참여율이 95%를 웃돌았다. 제주도청을 비롯해 법원·검찰,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단정, 극우세력인 서북청년단을 제주로 끌어들였다.

이후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로 변했다. 1954년 9월21일까지 무려 7년7개월간 제주 인구의 9분의 1인 2만5000∼3만명이 희생됐다. 정부 조직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공식 신고한 희생자만도 1만5000명에 이른다. 이 중 86%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고, 어린이·노인·여성 등 노약자의 희생이 무려 33%를 차지했다.

이후, 4·3은 제주는 물론 한반도에서 반세기 넘게 금기어였다. 제사마저도 숨죽이고 치러야 했다. 언제 빨갱이로 낙인 찍힐 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게 제주도민이 겪은 4·3의 진실이다.

이념과 국가폭력에 의해 스러진 민초들의 희생은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해원의 길이 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도를 방문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정부 차원에서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정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국가공권력 책임’ 부분을 쏙 빼버리는 등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공식 사과 이후 11년이 지난 2014년에야 4·3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지만, 되레 갈등만 부추기고 있다. 국가기념일 추모곡 논란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의 재판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 5·18의 노래라면, ‘잠들지 않는 남도’는 제주 4·3의 노래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는 가수 안치환이 만든 민중가요다. 연세대 학생이던 1987년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면서 만들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2’ 음반에 실렸다. 음반 뒷면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8년의 제주 4·3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노래이다. 아직껏 그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4·3민중항쟁의 역사가 장중한 가락에 실려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노랫말 하나하나에 4·3의 아픔과 분노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라는 가사가 단적인 예다. 4·3의 상처와 아픔을 비장하게 묘사한 이 노래는 대학가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제주 4·3진상규명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불렸다. 권력의 억압·왜곡에도 4·3을 기억하게 한 힘은 바로 이 노래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다. 힘겹게 싸워 5·18, 4·3을 국가기념일로 명예회복을 이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노래들은 정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기념식때 제창이 아닌 합창으로 축소됐고, ‘잠들지 않는 남도’는 4·3추념식 공식 석상에서 아예 사라졌다.아직도 5·18과 4·3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지난달 29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가장 먼저 반긴 이는 ‘까악∼까악∼’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제주사람에게 한이요, 슬픔이다. 4·3의 작가 현기영은 ‘순이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에서 제주의 아픔을 까마귀로 상징했다.

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 기념공원이다. 공원에는 4·3평화기념관과 위령탑, 각명비, 위패봉안소, 유해봉안관, 모녀상(비설) 등이 조성돼 있다.

기념관에는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편지글들이 수북하다. 전시실 출구 벽면에 관람객들의 소원지가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워 4·3의 울분을 달래고 있고, 출구 앞 정자나무 ‘해원의 폭낭’에도 넋을 위로하는 글들이 주렁주렁하다.

기념관을 나오면 오름 분화구를 형상화한 공원 중심부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4·3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하기 위한 인간의 어울림을 표현한 상징조형물이다. 위령탑을 지나면 추모승화광장과 위패봉안소, 행방불명 의생자 위령단 등이 나온다.

위령단에는 4·3사건 당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주의 산과 들에서, 육지형무소에서, 깊은 바다에서 졸지에 희생되었으나,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행방불명 희생자는 4000여명의 표석이 설치돼 있다.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훈으로 삼아 화해와 상생으로 거듭나자는 다짐이다.

기념조각 ‘모녀상-비설(飛雪)’은 가슴이 아린다. 1949년 1월6일 봉개동지역에서 토벌작전을 펴던 군인들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피신도중 토벌대의 총에 맞아 희생된 변변생(당시 25세) 모녀를 모티브로 조각했다. 하얀 눈밭을 표현한 백대리석의 원형판 위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제주=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사진=박기웅기자 pboxe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