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9> ‘시월에 서서’ 부산,마산] 시월에 서서, 민주주의 횃불 다시 밝힌다
“유신 철폐·독재 타도” 부마항쟁 정신 계승
1988년 부산대생들 기념탑 건립·노래 제작
1988년 부산대생들 기념탑 건립·노래 제작
![]() 대학생들이 시작했던 시위는 시민들에게도 번져 5만여 명의 인파가 삽시간에 남포동 극장가에 몰렸다. 시민 시위대가 남포동 ‘부영극장’에 집결한 모습.
〈웹사이트 ‘나무위키’ 캡처〉 |
부산대 총학생회는 1985년부터 대동제를 열고 얻어지는 수익으로 시작해 10·16 기념탑을 세울 돈을 마련했다. 자동판매기 수익 등 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은 결과, 1988년 11월에야 탑을 세울 수 있었다. 매년 10월 16일이면 이곳에서 부마항쟁 기념식을 열고 있다.
5·18이 일어나기 전해인 1979년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박정희는 1978년 유신헌법을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헌법기관을 만들고 홀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무효 1표를 제외한 대의원 2577명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떠난 민심은 그해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러났다.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을 앞질렀다. 8월 9일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사주에게 밀린 월급을 달라며 농성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정권이 YH농성을 지원하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키자 국민의 분노는 극으로 치달았다. 이는 부마항쟁으로 표출됐다.
“청년 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1979년 10월 16일 10시, 당시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씨가 작성해 뿌린 ‘선언문’의 시작은 이러했다.
부산대 학생들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에 선언문을 뿌리며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날 학생들은 ‘애국가’, ‘선구자’, ‘통일의 노래’ 등의 노래를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40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순식간에 불어나 도서관 앞에 모였을 때는 200여 명에 달했다. 사복경찰의 기습에 자극받아 학생들이 행렬을 이뤄 운동장을 돌 때는 어느새 7000여 명의 성난 파도가 됐다. 일단의 학생들이 학교 정문의 담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자 학생들은 시청·남포동 여러 갈래로 몰려나갔다.
그 뒤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닌 부산 시민 전체의 민중항쟁으로 번졌다.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모인 5만여 명의 인파는 이후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충무동 일대의 골목골목을 돌며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목청껏 외치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대학생들이 오후 2시 남포동에 집결했을 땐 시장 상인들도 손을 털고 시위대와 합류한 상태였다. 남포동 시장 일대는 좁은 골목이 많아 시위자들에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최적지였다.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유명해지면서 ‘BIFF 광장’으로 불린다.
인근 고신대와 동아대생도 합류해 시위대 수는 더욱 늘었고 오후 6시를 넘기자 퇴근한 직장인과 노동자까지 합세해 수만 명이 됐다. 경찰은 최루탄 차량을 앞세워 시위대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밤까지 총 11개의 파출소가 불에 탔다. 17일에도 시위대는 언론사와 관공서 등에 돌을 던졌고, 밤늦도록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그날의 함성은 부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산 지역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항쟁이 시작됐다. 부산에서 항쟁이 시작된 지 이틀 뒤인 18일 오후 2시께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학생은 ‘민주 회복’, ‘학원 자유’, ‘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이날은 유신선포 10주년을 맞아 부산대 등 일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공수부대 1개 여단 등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경비 태세를 했으나 시위양상은 오히려 부산보다 더 격화됐다. 정부는 20일 정오에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衛戍)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4일간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됐다.
10·16 부마 민중 항쟁탑 주위에는 민주화에 몸바쳤던 신용길, 정행구, 양영신, 장재완 등의 추모비도 흩어져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많이 있소 /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많아요 / 그렇다면 침묵과 위선, 비겁함과 굴종은 누구의 할 일이란 말인가’
당시 부산대 국어교육과에 재학하다 부마항쟁에 참여하고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신용길이 지은 시 ‘브레히트를 생각하며’다. 신용길의 추모비에는 그가 쓴 시가 박재동 화가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쓴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인생의 목표를 고민하고 막걸리, 미팅, 연애를 누리기도 하는 대학생활의 낭만을 뒤로하고 조국의 민주화에 몸바쳤던 청년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부산·마산=백희준기자 bhj@kwangju.co.kr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5·18이 일어나기 전해인 1979년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떠난 민심은 그해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러났다.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을 앞질렀다. 8월 9일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사주에게 밀린 월급을 달라며 농성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정권이 YH농성을 지원하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키자 국민의 분노는 극으로 치달았다. 이는 부마항쟁으로 표출됐다.
부산대 학생들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에 선언문을 뿌리며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날 학생들은 ‘애국가’, ‘선구자’, ‘통일의 노래’ 등의 노래를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40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순식간에 불어나 도서관 앞에 모였을 때는 200여 명에 달했다. 사복경찰의 기습에 자극받아 학생들이 행렬을 이뤄 운동장을 돌 때는 어느새 7000여 명의 성난 파도가 됐다. 일단의 학생들이 학교 정문의 담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자 학생들은 시청·남포동 여러 갈래로 몰려나갔다.
그 뒤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닌 부산 시민 전체의 민중항쟁으로 번졌다.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모인 5만여 명의 인파는 이후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충무동 일대의 골목골목을 돌며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목청껏 외치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대학생들이 오후 2시 남포동에 집결했을 땐 시장 상인들도 손을 털고 시위대와 합류한 상태였다. 남포동 시장 일대는 좁은 골목이 많아 시위자들에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최적지였다.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유명해지면서 ‘BIFF 광장’으로 불린다.
인근 고신대와 동아대생도 합류해 시위대 수는 더욱 늘었고 오후 6시를 넘기자 퇴근한 직장인과 노동자까지 합세해 수만 명이 됐다. 경찰은 최루탄 차량을 앞세워 시위대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밤까지 총 11개의 파출소가 불에 탔다. 17일에도 시위대는 언론사와 관공서 등에 돌을 던졌고, 밤늦도록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그날의 함성은 부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산 지역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항쟁이 시작됐다. 부산에서 항쟁이 시작된 지 이틀 뒤인 18일 오후 2시께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학생은 ‘민주 회복’, ‘학원 자유’, ‘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이날은 유신선포 10주년을 맞아 부산대 등 일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공수부대 1개 여단 등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경비 태세를 했으나 시위양상은 오히려 부산보다 더 격화됐다. 정부는 20일 정오에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衛戍)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4일간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됐다.
10·16 부마 민중 항쟁탑 주위에는 민주화에 몸바쳤던 신용길, 정행구, 양영신, 장재완 등의 추모비도 흩어져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많이 있소 /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많아요 / 그렇다면 침묵과 위선, 비겁함과 굴종은 누구의 할 일이란 말인가’
당시 부산대 국어교육과에 재학하다 부마항쟁에 참여하고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신용길이 지은 시 ‘브레히트를 생각하며’다. 신용길의 추모비에는 그가 쓴 시가 박재동 화가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쓴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인생의 목표를 고민하고 막걸리, 미팅, 연애를 누리기도 하는 대학생활의 낭만을 뒤로하고 조국의 민주화에 몸바쳤던 청년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부산·마산=백희준기자 bhj@kwangju.co.kr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