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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가을 향기를 찾아 떠난 짧은 여행
2014년 10월 17일(금) 00:00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어느덧 아득히 높아져 있다. 높아진 하늘만큼 소리없이 가을이 찾아들었다. ‘우리 맞잡은 손에 땀을 나게 만들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간 데 없고. 그렇게 슬며시 찾아 온 가을은 ‘혼자 지내기엔 너무 아쉬움이 남는’ 계절.

삽상(颯爽)한 가을바람이 손짓하며 부른다. 지금은 불온한 꿈도, 가벼운 일탈도 모두 다 허용하겠다는 듯이. 그래그래. 가을은 그리움을 안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에 좋은 계절. 익어 가는 이 가을에 텅 빈 가슴을 그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길을 떠나기로 한다. 오가는 길에 읽을 요량으로 책 한 권도 챙긴다. 나희덕 교수가 최근 펴낸 ‘한 접시의 시’. 현대시를 아주 쉽게 풀어 쓴 시론(詩論)이다. 책은 달고 맛있었다. 덕분에 가을이 더욱 풍성해졌다. ‘친절한 희덕 씨’, 고마워요.

여수 밤바다는 ‘글썽이며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바닷가라면 아무 데라도 좋았다. 검푸른 바다가 보이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는 미처 준비를 못했지만 맨바닥이어도 괜찮았다. 아무려나, 좋았다.

쌓여 가는 소주병 수만큼이나 여인들의 얼굴도 발갛게 물들어 간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아니라 만면홍조(滿面紅潮). 그래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으리라. 단풍잎처럼 타오른 그 얼굴, 어느새 짙게 깔린 어둠이 가려 주고 있으니. 더군다나 한없이 너그러운 바다, 저 앞에 출렁이고 있잖은가.

여수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취기가 오르자 흥얼흥얼, 동행한 두 여인들의 입에서 절로 노래가 나온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흥이 도도해지면서 이윽고 ‘진도아리랑’ 가락으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하다’ 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를 잊은 지는 이미 오래. ‘노다∼ 가세, 노다∼ 가세’ 메기는소리(선소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밤하늘마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하는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받는소리(여음, 후렴구)는 낮게 깔려 출렁출렁 바닷물과 함께 출렁인다.

저만큼 떨어져서 낚시를 하다 말고 다가온 낚시꾼이 부러운 눈길로 말을 건넨다. 아무래도 고기가 잘 안 잡히는 모양이다. 여수의 밤은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아침 늦게 해장을 한 뒤 곧바로 진도로 향한다.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는 예술의 고장 진도로.

목적지는 조선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첨찰산(尖察山)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雲林)을 이룬다 해서 이름 지어진 운림산방. 일가직계(一家直系) 5대(五代)의 화맥이 20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곳. 최근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표(성인 2000원)를 끊고 안으로 들어서니 우선 널따란 연못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오각(五角)으로 만들어진 연못 한가운데에는 원형으로 된 섬이 있다. 섬에는 또 수령이 150년은 넘었을 법한 배롱나무가 우람하게 자리 잡았는데 아쉽게도 꽃은 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디선가 본 모습 아닌가 했더니 아, 이곳이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촬영지란다. 바람둥이 선비 배용준이 학처럼 고고한 열녀 전도연을 맘껏 농락했던 바로 그 영화.

연못을 돌아드니 한 그루의 매화나무 앞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서 있다. 매화나무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마침 문화관광해설사 한 분이 설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1786∼1866)가 소치 허련(1809∼1892)에게 선물한 일지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매화나무는 소치가 심은 그 나무가 아니라 후대목을 복원한 것이다.

허씨 집안의 예술적 끼를 이어받은 것일까. 때론 판소리 가락을 섞기도 하고 때로는 아쟁 소리까지 흉내 내며, 해박한 지식으로 운림산방을 소개하는 해설사 허상무(64) 씨의 입담이 구수하다.

사람들이 매화나무 옆 작은 기와집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드디어 운림산방이다. 소치 선생이 만년에 그림을 그리던 화실. 현판에 찍힌 낙관을 자세히 보니 ‘백련’(百鍊)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의재 허백련(1891∼1977, 소치의 방계 고손자)의 글씨란다. 운림산방 뒤로는 소치가 기거했던 살림집(초가집)이 있다.

소치는 글과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해 삼절(三絶)로 불렸다. 심지어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왕(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선비 화가다.

이런 그를 스승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어릴 적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던 소치가 추사의 제자가 된 것은 초의선사의 소개 덕분이었다.

운림산방은 그러나 소치가 숨진 뒤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이 팔고 떠나면서 옛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이후 미산의 큰아들이 다시 사들인 후 1982년 작은아들인 남농 허건(1908∼1987)이 원래대로 복원했다. 현재는 남농의 조카와 손자들까지 여럿이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일가 직계 5대의 화맥이 이곳 운림산방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소치기념관에 들러 양천 허씨 일가 5대의 그림을 감상한 뒤 천천히 운림산방을 돌아 나온다. 남도전통미술관과 진도역사관은 잠깐 스쳐 지나고 운림산방 바로 지척에 있는 쌍계사에 들른다. “아, 이곳에도 쌍계사가 있었네!”

돌아오는 길. 가던 길에 보았던 ‘팽목항 00㎞’의 이정표가 눈에 어린다. 팽목항, 차마 그곳은 갈 수가 없더라. 정말이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그저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차마 가기 힘들더라.

그냥 되돌아 나오는 마음이 아팠다. 가을 향기를 찾아 떠났던 짧은 여행의 끝자락이 슬프다. 마치 진도아리랑의 여음(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처럼 아리고 쓰리다. 아직도 가족들의 품에 돌아오지 못한 채 캄캄한 바닷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외로운 넋(孤魂)들을 생각하면, 더욱 아리고 쓰리다. 벌써 6개월. 기다림의 끝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덧없는 세월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