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비유, 정치인이라는 편집자 - 김환영 지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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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 비유, 정치인이라는 편집자 - 김환영 지식칼럼니스트
2026년 02월 03일(화) 00:20
영화계, 음악계, 콘텐츠 업계처럼 출판계, 언론계에도 편집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남의 글을 고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처럼 그들은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편집자의 편집 권한은 가끔 ‘편집 독재권’에 가깝다. 편집자는 글의 구조와 제목, 문체와 분량, 강조와 생략을 책임진다. 한국과 달리 미국 저널리즘 관행에서는 편집본을 사전에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 언론계의 ‘미리 보여주기’ 관행에도 장점이 있다. 글을 둘러싼 저자와 편집자의 권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유능한 편집자는 평범한 글을 명문으로 끌어올린다. 그 과정에서 초고가 원문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많이 고쳐야 좋은 편집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 그는 저자를 존중하면서도 사실과 논리를 의심하고 자신의 편집으로 글이 더 명확하고 읽기 쉽게 되는지 의심한다. ‘의심’은 편집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저자가 “이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다”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상당히 달라진 글을 접하고도 저자가 여전히 ‘내 글’이라고 느끼게 하려면 편집자는 저자에 ‘빙의’되다시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저자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어떻게 썼을까.” “전문성이 뛰어나지만, 글은 평범한 저자가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면 어떻게 썼을까.”

글 쓰기와 글 고치기의 효율적인 분업 속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 저자와 편집자의 역할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편집권은 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집권이지 집필권은 아니다.

글에 대한 최종 판단은 독자가 한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글이라면 최종 판단은 국민이 한다. 정치인과 정당은 집필자라기보다 편집자에 가깝다. 글쓰기가 혁명이라면 글 고치기는 개혁이다. 혁명은 예외적 사건이며 일상 정치는 대부분 개혁의 영역에 속한다.

집권 여당은 ‘역사와 제도에 대한 편집권’을 가진다. 그러나 초당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에서 여당이 편집권을 넘어 집필권까지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거 승리는 통치 권한을 부여하지만 국가 정체성 전반을 다시 쓰라는 위임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승자독식제는 선거 이후 정치적 직위와 자원을 독점하는 경향을 지칭한다. 이는 정책을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한국 정치사에서 여당이 편집 이상의 것을 밀어붙이려 할 때 성과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야당의 동의, 사회적 합의가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한국’, ‘제2의 건국’ 같은 구호가 남긴 결과는 공허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규정하거나 광복절을 ‘독립절’로 바꾸려는 시도 역시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라기보다 특정 방향의 재집필로 읽힐 여지가 컸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는 헌법과 선거를 통해 이미 합의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재집필에 해당한다.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려는 의도라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는 점에서 ‘자유 삭제론’은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저자가 “이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다”라고 느끼지 않아야 하듯, 국민이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상황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 편집은 상대 진영과 제도, 그리고 국민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편집자나 정치인이 하는 일은 설득이다. 저자와 독자, 상대편 정치세력과 국민·유권자를 설득해야 한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가진 권한이란 결국 사람들을 설득해 그들이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의심’과 ‘존중’이 덕목이다. “이 ‘편집’으로 대한민국이 더 좋아질까?”를 묻고 다른 정파에 ‘미리 보여주기’도 실천해야 한다. 여야는 국가와 민족, 국민과 시민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글’을 다듬되, 그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액턴 경이 말했듯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편집권도 권력인 이상, 위태롭다. 독자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그 위험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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