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시대의 참상 그림으로 기록·고발 … 민중미술운동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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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시대의 참상 그림으로 기록·고발 … 민중미술운동으로 진화
10 5·18과 1980년대 현실주의 민족민중미술
1980년대 한국 민주주의 현대사 대 변혁기
5·18 국가폭력사태로 시민들 집단 트라우마
예술, 순수미 탐구 떠나 메신저로서 수단 자처
80년대 초반 강연균·손장섭 등 목격담 사실적 기록
중반엔 조진호·홍성담 등 목판화에 투쟁의식 담아
청년작가들의 시사 풍자, 미술운동으로 집단화
2025년 11월 04일(화) 20:05
전국 6개 지역 연합작업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전, 1988, 금남로 2~3가. <조인호 전문가 제공>
1980년대는 한국의 민주주의 현대사는 물론 사회 문화적으로 대 변혁기였다. 광주에서 촉발된 5·18민주화운동은 10일간의 항쟁 기간과 이어진 공안 정국 하에서 국가폭력의 잔혹한 살상과 상처, 집단 트라우마를 남겨놓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후 모든 부면에서 시대정신과 현실 인식을 일깨우며 한국사회의 급속한 변혁을 이끌어낸 변곡점이기도 했다. 그 80년대에 특히 미술은 시각예술 특유의 즉각 전달 효과를 이용해 각종 집회 현장과 광장, 건물 벽면, 크고 작은 문화행동 곳곳에서 강력하고 빠르게 메시지를 전하고 열기를 북돋우는 시각매체로 기능했다.

예술이 자연이나 순수미의 탐구가 아닌, 사회와 시대 현실에 복무하는 수단이자 기능을 자처한 것은 남도 미술사의 일대 혁신이었다. 조선 중기 공재 윤두서의 시대정신이나 당대 사회현실의 직시가 끊기고, 자연 교감과 내적 감흥을 중시하는 자연주의가 조선 말 이후 호남 전통 남화나 인상주의적 구상회화 화맥으로 오랫동안 지역정서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청년 미술인이나 대학 재학생, 심지어 당시 고교생 미술학도들이 그런 자연정서나 미술의 관념과는 전혀 다른, 절체절명의 5·18항쟁 현장에 직접 섰거나, 간접 경험을 했다. 이들은 80년대 중반부터 뜨거워진 전국적 민주화운동 과정이나 학내 민주화운동들에도 주역이 되고, 그 혼돈의 시기를 관통해야만 했다.

강연균 ‘하늘과 땅 사이 1’ 1981. 종이에 수채, 과슈
시대 참상의 기록이자 저항과 투쟁의 선전매체

1980년대 광주미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 현실의 충격적 경험과 분노, 절규를 담은 작품들로 변혁의 기운을 담아냈다. 물론 1979년 홍성담·최익균(최열) 등이 결성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약칭 광자협)처럼 시대모순에 대한 미술의 증언과 발언의 힘을 모으려는 앞선 활동도 있었다. 이러한 20대 신예들의 시대에 맞선 발언과 더불어 당시 30대에서 40대 초 젊은 작가들 가운데서도 이전의 감성적 자연주의 대신 사회현실을 소재로 한 사실주의 작업을 택한 경우들이 여럿이었다.

맑은 빛깔의 감성적 수채화로 독자적 세계를 다지던 강연균은 1980년 하반기에 5·18 기간 중 목격하고 경험했던 참상과 분노를 그림으로 기록 고발하고자 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림으로 온전히 옮겨지지 않아 재작업을 거듭한 끝에 ‘하늘과 땅 사이 Ⅰ’을 완성하였고, 이듬해 서울 전시 때 1981년으로 서명하여 처음 발표했다. 또한, 폭도들의 도시로 왜곡된 광주 소식을 서울에서 전해 들은 손장섭은 ‘오월 함성’(1980)과 ‘광주의 어머니’(1981)를 그렸다.

5·18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더라도 당시 시국을 작품으로 풍자한 작가들도 있었다. 조진호의 맨몸으로 스크럼 짠 남성들 ‘세 사람’(1980), 신경호의 망월동 묘역 풍경 등 ‘넋이라도 있고 없고’ 연작(1980),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홍성담의 ‘자전거 여행-우상에 쫓기는 나’(1980) 등이다. 이들은 대개 비극적 상황에 따른 좌절과 절규, 비탄의 감정들을 거친 필치와 암울한 색채로 담았고, 이후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사실주의 연작을 계속했다.

1980년대 초반, 여러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5·18의 상처와 짓눌린 시대 분위기의 절망감과 허무주의 경향이 넓게 깔려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 들면서 저항과 투쟁의식으로 떨쳐 일어서게 된다. 이 가운데 1980년대 중반 중요한 시각매체로 등장한 목판화에서 시대의 기록과 고발, 비판 흐름이 나타난다.

조진호의 ‘오월의 소리’(1980), ‘무제’(1981, 도마 위 생선 가시와 칼), ‘돌아가야 돼!’ ‘네 탓이오!’(1983), ‘무등의 어머니’(1984), 김경주의 ‘봄밤에 비는 내리고’(1982), ‘삼재부적도’(1983), ‘돌아온 아들’(1985), 이준석의 ‘인산’, ‘묘지 가는 길’(1983), ‘귀가’(1985) 등이 그 예다.

특히 이 시기 목판화 작업에 집중한 홍성담은 1981년 ‘혈루’ 연작부터 ‘횃불행렬’,‘황금동전투’,‘헌혈구호’(1983), ‘대동세상 Ⅰ·Ⅱ’(1984) 등 오월판화 연작으로 80년대 민족민중미술의 한복판에 섰다.

홍성담 ‘대동세상’ 1984, 목판화
투쟁성 높여 집회현장 공공장소에 나선 민중미술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청년작가들의 시대의식과 정치·사회 시사 이슈에 대한 비판 풍자 작품들은 점차 미술운동으로 집단화 되어 갔다. 그 추동력은 대학가로부터 충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대학마다 재학생 민중미술패 활동이 학교 안팎의 집회 시위 현장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조선대 ‘시각매체연구회’(1984, 1986년 ‘땅끝’, 88년부터는 ‘개땅쇠’로 개명), 전남대 ‘불나비’(1986, 88년부터 ‘그림패 마당’), 목포대 ‘돛대’(1986), 호남대 ‘매’(1987), 전남대 ‘신바람’(1988), ‘광주전남미술패연합’(1988, 약칭 ‘남미연’) 등이 대학별 학생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이들은 강렬한 시각효과로 선전 선동성을 높인 대형 걸개그림이나 벽화, 길바닥 그림 등을 우선했다. 대개 군사정권과 신자본 제국주의, 분단조국 현실과 통일열망, 노동자 집단투쟁, 민주화 투쟁과정 희생자 등이 주제였다.

걸개그림이나 벽화는 압도적 크기나 메시지 전달력 때문에 집회 시위 현장과 공공장소에서 현실주의 참여미술의 첨예한 시각매체로 자리잡았다.

이상호·전정호 공동작업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1987), 전국 6개 지역 미술패들의 연합작업으로 제작해 지역 순회전 중 금남로에 펼쳤던 전체 길이 77m 11폭짜리 ‘민족해방운동사’(1988), 1988년 전남대 오월제 때의 폭 37m 대형 ‘오월에서 통일로’, 전대협 출범식 때 전남대의 ‘미제를 처단하자’(1989), 1989년 이철규 열사 영정그림 ‘너희를 심판하리라’(조선대 체육관), 조선대 회화과생들이 공동제작한 길이 50m의 ‘5.18~통일세상’(1990, 미술대), 전남대학교 참교육민족미술연구회와 미술교육학과 학생들이 함께 제작한 길이 50m 높이 10m의 ‘오월로 다시 살아와’(1990, 전남대 도서관) 등의 대형 걸개그림을 비롯, 전남대 사범대 외벽의 높이 16m ‘광주민중항쟁도’(1990) 같은 벽화에 이르기까지 용도와 장소에 따라 크기와 형식을 달리하며 선전미술 시각매체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80년대 후반의 정치 사회적 혼돈과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 대학가의 학내 민주화나 교육개혁운동 속에서 민중미술운동은 더욱 달아올라 시민사회운동이나 노동 현장, 가두집회 등 민중의 거친 숨결과 외침이 있는 곳 어디든지 찾아가 일정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들은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참여형식으로 시의성과 대중 소통력, 현장성과 실천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을 전후한 시기에 급증한 대형 선전 선동용 그림들은 이 시기를 특징짓는 시대적 산물이었다.



변혁기 시대변화 속 조직화한 민중미술운동

사회 현장 역할수행 과정에서 절감한 역량결집과 조직강화 필요성, 대중 소통력은 현실주의 미술운동을 보다 더 집단화시키는 동인이 됐다. 특히 대학 시절부터 익힌 미술패 집단활동은 졸업 후 민중미술 진영이나 현실사회 참여에 큰 힘이 됐다. 광주 민중미술운동 진영의 두 축은 ‘시각매체연구회’(시매연, 후의 광주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와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였다.

‘시매연’은 1983년 ‘일과 놀이’ 시각매체부로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민중문화연구회’로 재편입하고, 시민미술학교 운영 등 대중들의 미술활동 참여와 시각매체를 통한 비판정신과 시대의식 고양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1986년 7월에 ‘시각매체연구회’로 재출발하면서 집회 현장의 만장과 깃발, 걸개그림, 벽화제작 등의 활동을 펼쳤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5·18 이후 뜨거워진 시대변혁 욕구와 실천 의지를 한데 모으고자 1988년 10월 결성됐다. 민족적 리얼리즘 형식을 바탕으로 미술의 시대적 역할과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 시대착오적인 미술계 권위주의와 관행, 비민주적 요소의 척결과 미술교육 개선 등 사회 문화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1989년부터 2002년 해체하기까지 매년 금남로나 망월동, 도시공간에서 ‘오월전’을 열어 시대적 이슈를 대중에게 환기시키고, 분과별 발표전을 열기도 했다.

조인호 전문가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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