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공연가도 ‘정년이’처럼 ‘젠더 프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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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연가도 ‘정년이’처럼 ‘젠더 프리’ 바람
여성 국극 다룬 TV 드라마 인기
남녀 성역 없는 배역에 눈길
여성 소리꾼이 이몽룡·방자 역
‘살로메’ 공주 역할 남성이 연기
2024년 11월 05일(화) 19:10
공연가에 성별과 무관하게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 크로싱’ 열풍이 거세다.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타이틀롤(주역)을 맡은 김태리가 극중극 속 방자 역을 소화하는 모습. <출처 tvN>
1950년대 여성 국극을 다룬 드라마 ‘정년이’가 최고 시청률 13.4%(6화)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목포 출신 소녀 윤정년(김태리 분)의 성장담을 그린 이 작품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주역들의 판소리 실력 등으로 입소문을 탔다.

그 가운데 여성 배우가 남역까지 소화하는 ‘젠더 크로싱(젠더 프리·Gender free)’ 형식이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 정년이는 극중극 ‘춘향전’에서 방자 역을 열연하며 성역할 경계를 허물었다.

드라마 인기와 맞물려 지역에서도 상연을 앞두거나 무대화된 ‘젠더 프리’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남녀 역할을 구분 짓던 관성을 허물고 배우들 앞에 ‘성역(聖域) 없는 성역(性域)’이 주어진 것이다.

지난 5월 광주시립창극단이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펼쳐 보인 ‘천변만화’는 대표적인 예다.

판소리 춘향전 초입 부분을 단막창극으로 엮은 ‘광한루’ 대목에서 주역 한혜숙이 ‘이몽룡’ 역을, 이미소가 ‘방자’ 역을 소화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여성 소리꾼.

광주시립창극단이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펼쳤던 ‘천변만화’에서 연기하는 방자 역 이미소(왼쪽부터), 몽룡 역 한혜숙. <광주시립창극단 제공>
이미소 씨는 “남역인 방자로 ‘변신’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평소 목소리 자체가 남성적이지 않아서, 모든 대사마다 목소리를 (일부러) 긁다 보니 드라마 ‘정년이’처럼 목이 금방 쉬었다”고 했다.

이어 “그래도 평소 일상에서 할 수 없던 모션이나 대사를 연기할 수 있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며 “관객들 눈에 ‘여자처럼 보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귀엽게 관람해 주신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혜숙 씨 또한 “남성 역할임을 인지하고 있어도 문득 여성의 목소리로 돌아올 때가 있을 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그만큼 해냈을 때 성 고정관념을 넘어섰다는 기쁨도 크게 뒤따랐다”고 했다.

이들 여성 도령과 방자가 주고받은 소리, 몸짓은 전통적 남녀 이중 창(唱)에 새로운 파장을 남긴다. 광주시립창극단이 1989년 국극단으로 창단한 뒤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정년이’와 유사한 사례다.

ACC재단이 지난 5월 ACC 예술극장에서 상연한 남성창극 ‘살로메’. <ACC재단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ACC재단)이 ACC 예술극장에서 선보였던 남성창극 ‘살로메’도 마찬가지다.

살로메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공주로, 세례자 요한을 사랑한 살로메와 이를 둘러싼 헤로데 왕가의 그릇된 욕망을 표현했다. 뮤지컬 ‘광주’로 익숙한 고선웅 작가가 각색을 맡아 일찍이 화제를 모았다.

당시 김준수 등 11명 남성 배우는 성 경계를 허물고 세기를 풍미한 요부(妖婦) 등을 연기했다.

김시화 연출은 “실험적 도전인 ‘남성 창극’은 성 역할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시도해 볼 수 있는 공연 형식이라 생각했다”며 “이와 같은 ‘젠더 프리’는 전통예술 콘텐츠를 확장하고 대중화에 다가서는 한 방법일 것이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광주시립무용단이 1998년 광주문화예술회관(당시)에서 선보였던 정기공연 ‘호두까기 인형’. <광주시립발레단 제공>
연말 공연을 앞둔 광주시립발레단 작 ‘호두까기 인형’도 흥미로운 예다. 박경숙 예술감독은 일전과 마찬가지로 ‘마더 진저’ 역에 남성 배우를 출연시킨다는 복안이다.

영미권 재안무 버전에서 종종 볼 수 있던 이 배역에 대해 박 감독은 “남성 솔리스트의 파워를 바탕으로 종래 연극의 ‘젠더 롤(Gender role·성역할)’ 구분을 넘어서는 독창적 무대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근 지역 소극장 벙커 111에서 만난 여성 배우 전형진도 자신만의 페르소나로 성(性) 경계를 뛰어넘고 있다. 그는 지난 30일 임수림 극작가가 기획한 참여극 ‘빙의된 사람들’ 중 태수(남성) 역을 연기했다.

전 씨는 “처음엔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에서 남성 염소팔 역을 맡았는데, 당시 “남역과 잘 어울린다”는 피드백을 받고 이번 공연에서도 ‘아저씨’ 역할에 자원했다”면서 “행동을 거칠고 크게 한다거나 더 소탈하게 웃는 등 남성적인 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젠더 프리’가 단순히 성별과 의복을 바꾼 ‘코스프레’, 과장적인 ‘드래그 킹’과 달리, 성역할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고유한 예술 가치마저 담보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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