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고흥은 예술적 감성 전해준 탯줄 같은 곳”
<천경자 화백>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특별전 총감독 맡은 둘째 딸 김정희 교수
“고향서 단독전 의미 깊어…저항정신 깃든 예술도시 광주 남다른 감회”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특별전 총감독 맡은 둘째 딸 김정희 교수
“고향서 단독전 의미 깊어…저항정신 깃든 예술도시 광주 남다른 감회”
![]() 천경자 화백 둘째 딸 김정희 교수 |
“어머니가 뱀 그림을 그리던 시절 광주역 인근에는 뱀집이 있었습니다. 유리 상자에 뱀을 수십 마리 넣고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에는 기이하고 이색적인 풍경이었죠. 집안이 어려워져 고흥에서 광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시절이었다고 들었어요.”
최근 예술의거리 한 카페에서 만난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 김정희(수미타 김) 미국 몽고메리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스케치하던 모습이 회상된다고 했다.
올해 만 70세인 김 교수는 첫눈에도 젊은 시절 천경자 화백을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그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28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아메리칸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메릴란드대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누구 누구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는 말에서 그의 삶에 드리워진 어머니의 짙은 그림자가 가늠이 되었다.
교수가 되기 전 미국의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에서 일을 하던 때였다. 어느 날 한국에서 기자가 왔는데 “천경자 씨 딸 아니세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태연하게 “아닙니다”라고 말을 할 만큼 “철이 없었다”며 웃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처럼 그림을 그리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적 재능과 감성 등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으니 모전여전(母傳女傳)인 셈이다.
김 교수는 “어머니는 사생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특히 움직이는 뱀 그림은 지금 봐도 대단하다”고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물어 본적 있는데 어머니는 ‘한 시간 정도 바라보고 있으면 묘사할 수 있다’고 했다”며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사생 훈련 등을 많이 받은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언급했다.
김 교수는 현재 ‘찬란한 전설’ 특별전 총감독을 맡아 전시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화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유일의 단독 전시”라는 말에서 특별전 의미가 읽혀졌다.
김 교수는 10여 년 전 광주 예술의거리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 일환으로 북한미술전이 열렸는데 남편인 문범강(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이 감독을 맡았다. 남편과는 유학 중에 만났고 이후 결혼하고 미국에서 줄곧 살고 있다.
그는 “이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지만 광주에 오면 늘 감회가 늘 새롭다”며 “내가 태어난 도시이자 무엇보다 아버지(김남중 옛 전남일보 창업주, 광주일보 전신)와 어머니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현재는 ‘전일빌딩245’로 이름이 바뀐 ‘전일빌딩’을 볼 때면 건물에 투영된 역사성과 가치 등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주는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독특한 예술정신이 깃든 도시”라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성이 어머니의 예술관과 닮아 있다”고 덧붙였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일의 단독 전시인 만큼 그동안 준비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작품 대여가 가장 어려웠다. 대도시도 아닌 반도 끝자락 고흥이라는 점, 소장자들이 김 교수를 잘 모른다는 점은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대여를 위해 여러 문화기관 관계자, 개인 소장가 등을 만나 전시 의미 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며 “나중에는 특별전 중요성을 이해하고, 아끼는 소장품 출품을 흔쾌히 결정해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특별전은 “전시를 매개로 그림을 나누는 마음, 작품 소장 의미 등을 다양한 각도로 사유해볼 수 있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진심이 통했을까. 전남도립미술관 채색화 2점, 광주시립미술관 스케치 등 10여 점을 포함해 모두 58점이 모아졌다. 물론 그림을 모으기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다. 보험을 비롯해 운반, 보관, 항온항습 등은 해결해야 할 부분이었다. 가장 큰 과제는 분청문화박물관이 미술 전문 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걸 수 있도록 내부 공간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하는 점이었다.
그는 어머니와의 추억, 고흥 어머니 생가 등에 다녀온 이야기도 꺼냈다. 현재 생가는 주민의 소유자로 돼 있지만, 거주하지 않아 마당에 풀이 무성한 상태다. 김 교수는 향후 군 차원에서 복원 계획이 진행돼 어머니 생가가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흥 풍광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있는데 마치 여인의 젖가슴 같은 모습이었어요. 바다 색깔도 예쁘고…. 고흥의 풍광과 다감한 정서는 천경자라는 거목을 자라게끔 해준 자양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한마디로 어머니 예술세계를 전해준 탯줄 같은 곳이죠.”
“진한 남도 사투리는 어머니의 평생 페르소나의 한 축이었다”는 김 교수의 말에서는 모든 고향은 작가에게 예술적 DNA를 물려주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특히 어릴 때 봉황산에 올라 처음 본 바다 빛깔에서 어머니가 시각적인 충격을 받았을 거라는 얘기도 들려줬다. 유년시절부터 듣고 자란 남도 판소리, 육자배기는 예술적 감성을 키워준 중요한 문화자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경자 화가는 전통적인 한국화에 머물지 않았다.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해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천경자 화백은 그림 외에도 글을 매개로 대중들과 소통했다. 주옥같은 수필집도 많이 남겼는데 영화와 문학을 좋아했다. 문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으며 특히 박경리 소설가와 소통을 많이 했다.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김 교수는 “현재 미국에는 천경자 재단이 있다. 남편과 비영리재단을 만들었는데 올해 ‘제1회 천경자상’을 제정해 선정할 계획”이며 “천경자가 20세기 화가들과 견주어도 독창성 면에서 뒤지지 않는데 미국 국회도서관에 영문 도록이 없다. 천경자 영문 도록을 만드는 데에도 역량을 집중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100주년 특별전을 위해 지원을 해준 고흥군과 전남도, 소장품 대여자분들께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밝혔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최근 예술의거리 한 카페에서 만난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 김정희(수미타 김) 미국 몽고메리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스케치하던 모습이 회상된다고 했다.
교수가 되기 전 미국의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에서 일을 하던 때였다. 어느 날 한국에서 기자가 왔는데 “천경자 씨 딸 아니세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태연하게 “아닙니다”라고 말을 할 만큼 “철이 없었다”며 웃었다.
김 교수는 “어머니는 사생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특히 움직이는 뱀 그림은 지금 봐도 대단하다”고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물어 본적 있는데 어머니는 ‘한 시간 정도 바라보고 있으면 묘사할 수 있다’고 했다”며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사생 훈련 등을 많이 받은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언급했다.
김 교수는 현재 ‘찬란한 전설’ 특별전 총감독을 맡아 전시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화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유일의 단독 전시”라는 말에서 특별전 의미가 읽혀졌다.
![]() 천경자 작 ‘길례 언니 II’ |
그는 “이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지만 광주에 오면 늘 감회가 늘 새롭다”며 “내가 태어난 도시이자 무엇보다 아버지(김남중 옛 전남일보 창업주, 광주일보 전신)와 어머니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현재는 ‘전일빌딩245’로 이름이 바뀐 ‘전일빌딩’을 볼 때면 건물에 투영된 역사성과 가치 등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주는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독특한 예술정신이 깃든 도시”라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성이 어머니의 예술관과 닮아 있다”고 덧붙였다.
![]() 천경자 작 ‘소녀’ |
그러나 김 교수는 “대여를 위해 여러 문화기관 관계자, 개인 소장가 등을 만나 전시 의미 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며 “나중에는 특별전 중요성을 이해하고, 아끼는 소장품 출품을 흔쾌히 결정해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특별전은 “전시를 매개로 그림을 나누는 마음, 작품 소장 의미 등을 다양한 각도로 사유해볼 수 있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진심이 통했을까. 전남도립미술관 채색화 2점, 광주시립미술관 스케치 등 10여 점을 포함해 모두 58점이 모아졌다. 물론 그림을 모으기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다. 보험을 비롯해 운반, 보관, 항온항습 등은 해결해야 할 부분이었다. 가장 큰 과제는 분청문화박물관이 미술 전문 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걸 수 있도록 내부 공간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하는 점이었다.
그는 어머니와의 추억, 고흥 어머니 생가 등에 다녀온 이야기도 꺼냈다. 현재 생가는 주민의 소유자로 돼 있지만, 거주하지 않아 마당에 풀이 무성한 상태다. 김 교수는 향후 군 차원에서 복원 계획이 진행돼 어머니 생가가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흥 풍광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있는데 마치 여인의 젖가슴 같은 모습이었어요. 바다 색깔도 예쁘고…. 고흥의 풍광과 다감한 정서는 천경자라는 거목을 자라게끔 해준 자양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한마디로 어머니 예술세계를 전해준 탯줄 같은 곳이죠.”
“진한 남도 사투리는 어머니의 평생 페르소나의 한 축이었다”는 김 교수의 말에서는 모든 고향은 작가에게 예술적 DNA를 물려주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특히 어릴 때 봉황산에 올라 처음 본 바다 빛깔에서 어머니가 시각적인 충격을 받았을 거라는 얘기도 들려줬다. 유년시절부터 듣고 자란 남도 판소리, 육자배기는 예술적 감성을 키워준 중요한 문화자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경자 화가는 전통적인 한국화에 머물지 않았다.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해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천경자 화백은 그림 외에도 글을 매개로 대중들과 소통했다. 주옥같은 수필집도 많이 남겼는데 영화와 문학을 좋아했다. 문인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으며 특히 박경리 소설가와 소통을 많이 했다.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김 교수는 “현재 미국에는 천경자 재단이 있다. 남편과 비영리재단을 만들었는데 올해 ‘제1회 천경자상’을 제정해 선정할 계획”이며 “천경자가 20세기 화가들과 견주어도 독창성 면에서 뒤지지 않는데 미국 국회도서관에 영문 도록이 없다. 천경자 영문 도록을 만드는 데에도 역량을 집중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100주년 특별전을 위해 지원을 해준 고흥군과 전남도, 소장품 대여자분들께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밝혔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