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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특별한 여행법 -김은지 산문집 ‘동네 바이브’
2024년 05월 23일(목) 00:00
어릴 때는 친구가 사는 옆 동네에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혹시 길을 잃을까 걱정하면서도 우리 동네와 다른 느낌에 생경해하고, 비슷한 모습에는 반가워했었다. 지금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여행이나 휴가라는 특별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채 방문하는 타지에서 나는 이제 최대한 건조하다. 지도 앱을 켜 그곳에 도착할 최적의 방법을 찾아 빠르게 이동한다. 그곳에서 볼일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어서 돌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되돌아볼 만한 건 얼마 없다. 지나쳐 간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 기차역 벤치에서 얼핏 들렸던 옆자리의 대화, 계절에 맞게 피어난 꽃들의 이름, 하늘과 구름의 모양…. 이런 것들은 여행지에서나 신경 쓸 것이지 평소에는 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가령 근래에 한 북토크나 책 관련 행사가 특히 그렇다. 모두 이토록 건조하고 신속하게 치렀다. 시간에 딱 맞게 기차표를 예약하고, 기차에 앉아서는 다른 업무를 하거나 눈을 좀 붙이고, 역에 도착해서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간에 알맞게 도착해 현장 분위기를 조금 익히고, 언제나 그렇듯 행사에 돌입한다. 물론 책을 읽고 작가를 만나러 와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감출 길 없지만, 그래서 행사 내내 열정을 다하지만, 그 시간의 앞뒤 행로는 그저 그렇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것이 전혀 없고, 피부와 코끝에 스치는 것도 별로 없다. 바쁘디바쁜 현대인에게 여유 부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괜히 한눈 팔다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로 걸을 때 걷는 동네의 ‘바이브’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이브(vive)란 분위기나 낌새, 느낌을 뜻하는데 그런 것들은 이정표에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검색한다고 제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감각으로 존재할 뿐이니,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바이브라는 게 인식될 리 없다. 여행지에서는 그곳의 바이브를 느끼려 하고, 그 바이브에 몸을 맡기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여행은 1년에 몇 안 되는 이벤트일 뿐이다.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느낌과 낌새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인색하게 군다. 그런 우리에게 인생은 여행이 아니다. 인생은 업무나 과업에 가깝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지금보다는 더 즐거울 텐데 말이다.

김은지 시인의 첫 산문집 ‘동네 바이브’는 인생이 여행이 되게끔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동네의 분위기와 낌새를 전달하려 애쓴다. 시인은 날마다 여행하는 듯 설레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여행지라는 데가 자신이 지금 사는 곳이거나, 예전에 살았던 동네다. 혹은 북토크에 초대받아 간 지역이거나, 취재 때문에 방문한 고장이다. 망원, 송파, 노원, 화성, 울산, 양평, 순천, 제주…. ‘전국 노래 자랑’이나 ‘6시 내 고향’에서나 볼 법한 구수하고 친숙한 동선이다. 시인은 그곳을 여행한다. 말하자면 국내 여행인데 시인의 여행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 그 특별함이 바이브를 발견하고, 전달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망원동에서는 성산대교를 따라 움직이는 철새를 발견한다. 노원에서는 동네서점에 가는 근사한 길을 네이버나 구글보다 훨씬 정답게 알려준다. 제부도에서는 허술한 친구들의 든든한 우정을, 순천에서는 순천만을 즐기는 시인만의 느긋함을 보여준다. 그곳을 시인은 그저 거주하거나 일 때문에 들른 것이지만, 그 여정과 동행을 천천히 헤아려 어느덧 같은 곳을 세상 어디보다 근사한 여행지로 만든다. 시인이 소개하는 국내 곳곳의 익숙한 지명은 이 책에서 주말 홈쇼핑에서 홍보하는 유럽의 도시보다, 여행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오지 마을보다 더 가고 싶은 곳이 된다. 시인의 전하는 바이브를 나도 느껴보고 싶어진다. 무엇이든 시로 쓸 수 있다는 시인의 다정한 패기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어릴 때처럼, 어딜 가더라도 마냥 설렐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당장 내일 오후 광화문 외근에서부터 시작해볼 참이다. 그 동네의 바이브를 헤아려보고 싶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