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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첫 만남의 기억, 모악산의 점현호색
2024년 04월 17일(수) 22:30
식물을 그림으로 그리는 내게 가장 바쁜 계절은 바로 지금이다. 이른 봄 복수초와 깽깽이풀, 얼레지, 히어리에 이어 잔털벚나무와 올벚나무 그리고 지금은 동의나물과 피나물이 연이어 숲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요즘 나는 단 하루로 빠짐없이 산과 수목원을 헤맨다. 아침에 꽃봉오리를 맺던 식물이 오후가 되면 꽃을 피우고, 어제 꽃을 만개하던 식물이 오늘 꽃잎이 떨어지는 변화를 경험하다 보면 지금 당장 식물을 보러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가 뜨면 밖에서 식물을 관찰하고, 해가 지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몇 주 째 지속하고 있다. 이맘때엔 지인들로부터 식물 이름을 묻는 연락도 자주 받는다. 다채로운 봄꽃을 마주한 사람들이 내게 본인이 찍은 식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름을 묻고,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을 하곤 한다. 그런데 자주 나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사진 속 식물이 있다. 그것은 현호색이다.

4월이면 현호색은 숲과 들 가릴 것 없이 꽃을 만발한다. 보라색, 흰색, 파란색 꽃들이 부서지기 직전의 건조한 낙엽 틈새를 비집고 나온다. 현호색은 종명이기도 하지만 현호색속 식물을 총칭하기도 한다. 현호색속에는 전 세계적으로 300여 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20여 종이 분포한다. 이 중 10여 종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우리에게 아주 귀한 식물군인 셈이다.

현호색이 내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변이가 다양하다는 데에 있다. 같은 종일지라도 잎 형태와 꽃색 등이 다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아는 종이더라도 한 번 더 확인하게 되고 확신이 들어도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식물세밀화는 식물의 종 특징을 드러내는 기록물이다. 현호색속은 형태와 색에 있어 다양성을 지닌 식물이란 점에서 이들을 그리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현호색속에는 선현호색, 남도현호색, 왜현호색, 점현호색, 갈퀴현호색, 조선현호색, 들현호색, 날개현호색, 각시현호색, 섬현호색 등이 있다.

4년여 전 이맘때의 계절, 전북 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식물세밀화 강의를 마친 다음날 미리 준비해간 등산복을 입고 근처 모악산에 올랐다. 한참동안 산을 오르던 중 눈앞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형광 하늘빛 꽃을 피운 현호색이었다. 20㎝가 채 되지 않는 키에 잎에는 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점현호색이었다. 어두운 흑갈색 땅에서 피어난 청명한 푸른빛의 꽃. 이들을 발견한 기분은 마치 일본에서 히말라야푸른양귀비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았다.

식물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한 색. 인간이 염색하고 잉크를 주입하여 푸른빛을 띠던 꽃 시장 튤립의 존재가 무색하게도, 이들은 자연적인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날 모악산에서 다양한 풀꽃을 만났지만 어쩐지 현호색 푸른 광채의 황홀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7년 전에는 한 방송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나물로 이용되는 식물을 시청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며 내게 식물세밀화를 그려달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야생화를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제안을 수락하였고, 그때 내가 그림 그려야 할 목록에는 어김없이 현호색이 있었다. 그해 나는 현호색의 뿌리부터 관찰하였다. 현호색은 덩이줄기를 갖고 있다. 이것은 구형이고 색이 희다. 그림을 다 그리고 채취해두었던 덩이줄기를 제자리에 다시 심어주었더니 푸른 꽃을 피웠다. 나는 그들의 개화와 결실까지 관찰하여 그림을 완성했다.

현호색의 덩이줄기는 생약으로도 이용된다. 대표적인 소화제 까스활명수에도 현호색이 주원료로 포함되어 있다. 현호색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던 셈이다.

며칠 전 우리 동네 경기 남양주의 천마산에 올랐다. 산을 오르며 나는 꿩의바람꽃과 큰괭이밥, 얼레지, 노루귀 등을 만났다. 그리고 모악산에서 만났던 그 점현호색도 만났다. 현호색을 식별하기란 언제나 무척 어려운 일이었는데, 나는 단번에 이들이 점현호색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악산에서 만난 것과 같은 형태의 잎 무늬와 꽃색을 지녔다.

첫인상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존재가 있다. 내겐 점현호색이 그런 상대다.

<식물 세밀화가>